가르침 (teaching) 전수(handing on)

가르침과 전수는 초대교회가 이해했던 중요한 원리였습니다.

그들은 가르침과 전수를 다르게 구별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가르침과 학설들이 넘쳐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각각의 영적 교훈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을 주장하며 그 교훈을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게다가 다양한 번역본들과 옛 문헌들, 교회의 유산들이 다시 편집되어 출판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온갖 종류의 가르침(진짜 가르침, 가짜 가르침, 섞여있는 가르침)의 플랫폼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교훈들이 진짜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를 묻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7:17절에서 바리새인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질문했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7:17)

여기서 예수님은 처음으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면서 가르침이 하나님으로 부터가 아니라 사람에게서도 올 수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듣는 가르침의 근원이 하나님에게서 온것인지 확인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가짜의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은 여러 죄들과 영적인 병들로 상처 가운데 있기 때문에 치유받고 회복되기 위해서는 초대교회에서 말하는 영적인 의사가 필요합니다.

진실된 진짜 가르침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세대의 영적 삶이 매우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것이 놀랍습니다 . 또한  진정한 하나님의 진리가 ‘일반적인 전통들’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과 섞여 있기도 합니다. :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막7:7-8)

초대교회의 가르침은 두가지의 기둥, 즉 ‘가르침(teaching)’과 ‘전수(handing on /passing on)’ 에 근거해서 세워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이 수집되어 쓰여지기 이전의 초대교회에서는 실제로 믿음의 진리 그대로 사는 사람들의 본을 보고 그 진리를 받아 들인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삶은 가르침에 대한 진리를 증거하는 삶이었습니다.
그 예로 사도바울은 제자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딤후2:2)

그러면 가르침과 전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가르침(Teaching)은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 안에 살아계신 성령님으로부터 가르침의 은사를 받은 사람(교사)들이 이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엡4:11)

초대교회에서는 가르침의 기름부음을 하나님으로 부터 받아 교사로 부름받은 사람만이 교회에서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반면에 전수(Handing on)는 이러한 진리들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는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어떻게 하면 진리들이 실제적 삶에서 실행될 수 있는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오랜 여정을 통해서 ‘교사(teacher)’를 준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사란 지금처럼 교회에서 그저 가르치도록 허락받은 자들이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이해했던 오중 직임으로서의 교사를 의미합니다.  성령님은 한 사람 안에 이런 신성한 은사를 만들어 엮어나가십니다. 초대교회에서 가르침이란 그저 인간적 능력이나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것, 혹은 믿음을 나누는 차원이 아니라, 은사이며 긴 여정을 통해 그 사람의 삶 안에서 엮어져 나가는 것이였습니다. 한 사람이 성령님의 일하심에 반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그 사람 안에서 이 은사가 발전되고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 결과 이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설명할 때면 거룩하고 완전한 방법으로 진리들을 제시하게 됩니다.

우리 세대에는 성경을 다 이해하거나 성경 전체를 읽지도 않은채 가르치는 선생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성경의 어떤 부분은 전혀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 저기서 성경구절을 뽑아서 가르치는 가르침은 반쪽 짜리 진리이며 완전한 진리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반쪽 짜리 진리 때문에 우리의 영적인 삶에서 만성적인 죄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진리는 우리는 자유롭게 하지만 반쪽의 진리는 절대로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 따르면 교사는 성경의 모든 책들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할때 부분적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책에서 전체적으로 전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사는 직접 이 진리대로 영적인 삶을 살면서 경험한 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했습니다.

준비되는 오랜 여정 동안에 이 사람은 영의 걸음을 걸으며 장애물들을 경험하기도 하고 동시에 길 가운데 향기를 경험하기도 하면서 삶 가운데 열매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 결과 그는 분별력과 하나님의 빛을 통해서 영적인 자녀들을 이끌어 가게 됩니다.

따라서 초대교회에서는 이렇게 영적인 자녀들을 이끌어 갈수 있는 영적인 아비 됨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여 지는 길’에 대해 훈련되어 있지 않고 사단의 방법들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길을 걸을 때에도 사단을 대적하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고 이끌 수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치 전쟁의 경험도 없고 전쟁에 대비한 훈련 조차 받아본 적이 없는 ‘장군(General)’이라는 직함만 가진 어떤 사람이 겉으로만 보여지는 유니폼의 화려함에만 집착하고 뽐내는 격입니다. 따라서, 전수(handing on)는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은혜이자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허락하시는 선물입니다. 삶을 전수하는 영적 아비이자 교사인 사람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에 대해 바르게 분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가르침을 전달한다해도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영적 상태를 분별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받아 들일 수 있는 수준에 맞게 전달할 수 있게 됩니다.

초대교회 사막의 예배자 중 한 분이였던 Saint John of the ladder는 ‘어떤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한 사람에게  똑같은 약을 준다해도 어떤 때는 약이 되지만 어떤 때는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정확한 시간에 주어질 때 치유를 가져오는 약으로 기능하지만 잘못된 시간에 주어지면 독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초대교회가 살아간 방식입니다. 듣는 자들은 ‘가르침’을 통해서 이해(understanding)를 얻고 ‘전수’를 통해서은혜(grace)를 동시에 받는 것입니다. 이해가 길의 반을 가게 한다면 은혜는 강건함을 주어 나머지 길의 반을 가게 합니다.

가르침을 들을때 새로운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이해된 것을 삶에 적용할 때는 어려움에 봉착해서 그만두게되며 삶에 변화가 없습니다. 가르침을 받아서 그 가르침에 대해 이해하는것 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은혜 입니다. 은혜가 이해한 대로 살아가게 도와줍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가르칠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삶으로 전수할수 있을때 교사의 은사를 받았다고 보았습니다.  가르침이란 성경 전체를 통해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고 전수란 진리를 어떻게 살아나가는 지를 보여주며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가르침을 들은 어떤 사람이 비틀거리거나 넘어진다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다시 일어나도록 도와주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자신의 삶에서 진리대로 살아간 교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사는 장애물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대에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준비시킨 이런 교사들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성령님으로 부터 이 두 가지 선물(은사), 즉 가르침(teaching)과 전수(handing on)를 부여받은 교사들이 너무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므로 가르침은 항상동일하게 변하지 않고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이 인격화되고 표본화되어 진실된 삶의 간증으로 마지막 때의 세대에게 까지 전달해줄 사람들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헬라어로 전수(handing on)라는 의미를 가진 성경 구절들을 보고자 합니다.  안타깝게도 전수(handing on)라는 단어가 여러 언어로 번역되면서 그 의미가 다르게 번역되었습니다. 이렇게 잘못 번역된 이유는 전수(진리대로 사는 삶)의 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말씀구절들은 어떻게 초대교회가 진리대로 살았는지에 대한 완전한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4:9)

이 구절에서 바울이 언급한 4가지를 주목해 보십시요. :  배우고, 받고, 듣고,   여기서 두번째 “받고 ”가 전수(handing on)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첫번째 “배우고”는 무었을 의미일까요? 바로 가르침(teaching)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배울까요? 바로 가르침을 통해서 배웁니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가르침 뿐만 아니라 전수도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음에 주목하십시요.
다른 두 단어 듣고” “본” 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  즉, 내가 너희를  가르친 것을 들었고 또한  너희에게 가르친 대로 내가 사는 것을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보았다는 것은 그들 앞에서  삶의 모범의 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람들을 가르쳤고 가르친 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듣고 그의 삶을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사도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한번 이상 교회를 향해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처럼 나를 본받으라” 고 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와 다른 단계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었고 그분을 본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사람들에게 자신을 모방하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대담한 말이 아닙니까? 요즘 누가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사도바울이 그리스도를 본것 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들이 안전하게 지나가도록 길을 닦는것과 같습니다.  디모데 후서에서 이런 생각을 볼 수 있는데 길을 닦을 뿐만 아니라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파고 깨끗하게 한다고 쓰여있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은 듣는것 뿐만 아니라 가르치대로 사는 삶을 볼수 있어야 함을 기억하십시요.

불행하게도 우리 세대는 많은 것을 듣고 있지만 볼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과학책이 아닙니다. 듣는 것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보여져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고전 11:23)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고전15:1)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15:3)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1:9)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1: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골2:6)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는 말씀은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어떤 특별한 영적인 경험을 이야기 할때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로 부터 전수(전달)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였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데전 2:13)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딤후1:14)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딤후2:2)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영적인 삶은 듣고 보는 원리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예수그리스도 그분의 가르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사도들이 그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이제는 복음서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를 듣고 보는 것으로 말씀하셨는지 보겠습니다. 공관복음에 나오는 변화산상의 이야기입니다.

마가복음9:2-13 변화산 이야기입니다.  변화산의 이야기 바로 직전의 구절인 1절을 보십시요.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9:1)

And He said to them, “Assuredly, I say to you that there are some standing here who will not taste death till they see the kingdom of God present with power.”(NKJV)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the kingdom of God)을 전파하여 (막1:14)
Now after John was put in prison, Jesus came to Galilee, preach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of God, (NKJV)

마가복음 1:14 과 9:1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들려지고(전파되고) 보여져야 함을 알수 있습니다.

마태복음17:1-8 변화산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요. 그러면 변화산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직전의 구절인 마태복음16:28 에서 마가복음9:1절에서 보았던 똑같은 단어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16:28)

다시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가 보여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이 항상 변화산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음을 주목하십시요.

이제 누가복음으로 가보겠습니다. 변화산의 이야기는 누가복음9:28-36에 나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직전의 구절인 누가복음 9:27절을 보십시요.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눅8:27)

여기에 다시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좋은 소식이라는걸 압니다. 이 좋은 소식은 전파하고 들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보여지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 포인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질문이 있습니다.

왜 변화산의 이야기는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과 연결되어 있을까요?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전에는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게 무슨 말일까요?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1세기 그 당시에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여기 서있는 너희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사람이 있다.   무슨 의미일까요?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후 일주일 후에 변화산의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28을 보면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라고 했습니다. 즉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후 팔일 쯤이 지난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루가 끝난 후 팔일이 지난것 입니다. 누가복음9:27에서 예수님의 하루가 끝나고 예수님과 모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변화산의 일이 일어납니다. 물론 3명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일주일 전에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하셨던 말씀(눅9:27)을 그 자리에서 함께 들었습니다.  이 세 제자들은 하나님이 이 사건의 증인으로 선택하신 자들입니다.

이 세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가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는 것을 목격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과 찬란함 등 모든 것을 설명하시며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하실 것임을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은 그들에게 희미하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였습니다.  실제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이신 예수님(예수님은 선생님이셨습니다)이 세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갔고 그들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되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 안에서 인격화된 것을 보게되고 이해하게 됐습니다.

마가복음9:2로 가보겠습니다. :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8일, 혹은 6일로 나오는 이런 차이는 누가복음에서는 시간적 순서에 촛점을 맞추어서 시작의 날과 끝의 날을 더해서8일로 명시한것으로 날짜의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일주일의 시간 간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1을 보겠습니다. :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초대교회에서는 바로 이 원리(가르침과 전수:듣고 보아야하는 원리)가 예수님으로 부터 직접 전해졌다고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듣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개인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일까요?

왕이신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이며 그분의 나라가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1)

헬라어로 ‘너희 안’라는 의미는 ‘너희 안(in you)과 너희 가운데에(among you)’ 의 뜻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우리의 내면에 그분의 왕되심을 선포하는 것”이 영적인 삶의 의미였고 그것을 목표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듣는 것 뿐만 아니라 보여져야 하는 원리임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는 반드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가르치는지 알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진리의 원리를 듣고 이해할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자의 삶 가운데 인격화된 진리를 보면서 깊은 영향을 받게 되고 격려를 받아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교사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충만함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며 동기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초대교회에서는 이해와 함께 은혜를 구했습니다. 교사가 진리를 설명할때는 이해력을 주는 것이지만 가르침이 인격화된 교사의 삶을 통해서는 은혜가 풀어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오중 직임으로서의 교사 직분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기름 부음 받은 자가 가르칠 때 그 사람의 삶으로 부터 듣는 자들에게 은혜가 전달(Impartation)된다고 확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중 직임의 교사직분을 받은 자가 가르칠 때의 다른 점입니다. 이런 교사는 가르침을 통해 이해와 진리, 삶과 은혜를 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 가지를 동시에 받는 것입니다.

은혜야 말로 참된 것이며 여러분이 머리로 이해한 것을 삶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 여러 교회 미팅과 만남에 참석하면서 우리의 노트에는 많은 것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늘 같은 자리에만 머물러 있고 알게된 것을 삶에서는 경험하지 못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요. 가르침을 듣고 흥분하며 기록하지만 그저 기억으로만 남게될 뿐입니다.  한달정도 지난 후에는 기억조차 사라질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