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생활의 핵심적인 기초들(믿음,기도,깨어있음,하나됨)에 대해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기도에 대해서 나누겠습니다.
기도라는 주제를 생소하게 느끼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적 생활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하며 표면에 머물면서 도전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요동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런 삶 대신, 우리는 변함없이 꾸준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것은 곧 우리가 변화되고 또 변화시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환경을 변화시키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며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따라 그분과 동역해야 합니다.
따라서 기도에 대한 오늘 메시지는 새로운 차원에서 다르게 접근할 것입니다. 이것은 수년 후 우리가 도달해야 할 성숙의 단계로 있게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약속과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맡기고 성령의 은혜로 강건하게 하여 보낼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주님과 동역하면서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시편 63:1, 2)
우리는 지금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 있지 않습니까? 내면의 영적인 메마름과 예배하는 영혼에게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성령의 생명수의 부재는 우리로 하여금 신음하면서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를 갈망하게 만듭니다.
이곳 저곳에 있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을 통한 그분의 위대한 일하심에 대해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속지 않기 위해 많은 분별력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사역들에는 괄목할 만한 역사가 일어나지만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육적인 열정이나 거짓이 그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신실한 종들과 함께하시는 주님의 일하심에는 참된 나타남들이 있습니다. 이런 참되고 진정한 것들은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며 부정적으로나 피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것은 기도와 관련된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에 대해 이야기하게 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무엇이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기도인가요?
둘째, 기도의 궁극적인 목표나 목적은 무엇인가요?
1. 무엇이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기도인가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기도 생활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해 나누기 원합니다.
A.기도와 하나님에 대한 만족
B.변화되는 기도
A. 기도와 하나님에 대한 만족
옛 만나가 광야 여정 내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충분한 양식이었던 것처럼, 시편은 신실한 믿는 자들인 새 이스라엘을 위한 영적 만나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이 세상의 광야를 지나는 동안 우리를 채워줄 영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오 주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셔서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 영양이 공급되고, 헛된 일로 우리의 관심을 자주 분산시키는 숨겨진 허기가 채워지고 만족감을 누리게 하소서!
오 주님, 약속하신 말씀대로 당신의 나라의 비밀들로 우리를 만족하게 하소서: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마태복음 13:11).
주여 그렇습니다, 우리의 참된 내면의 만족은 주님의 신성한 신비들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 신비들을 먹고 알게 될때 그 양식을 사랑하고 계속해서 사모하고, 찾고 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신비들이 우리를 채우면 우리는 또 다시 그것을 구하게 될 것이며 그것 없이는 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주님 나라의 신비들로 채워지면 우리의 영혼과 우리 존재 전체가 위를 향해 들어올려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의 것을 찾고, 슬픔과 탄식밖에 남아있지 않는 이 땅의 것들, 아래에 있는 것들에 이끌리지 않게 됩니다.
성경 말씀이 기억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골로새서 3:1, 2)
따라서 기도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나의 존재가 위(하늘)를 향하게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그분의 위대한 일하심이 내 삶에서 열매 맺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의 어느 것도 경험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세상이 처한 상황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거룩한 아토스 산(mt.Athos)의 장로 한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쾌락만을 섬깁니다 ; 배고픔을 통해서 어덯께 쾌락을 증가시킬지에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속적인 신들과 세상의 신들은 당신을 삼키고 싶어하며 텔레비전, 인터넷, 신문, 광고 회사 등을 포함하여 기아(배고픔)를 만들어내는데 전념합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오늘날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요하지도 않은 과도한 지방을 자신의 몸에 덕지덕지 붙여두고 있지 않나요?
이것은 하나의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장 강력한 것은 성과 성적 쾌락에 대한 끊임없는 배고픔입니다. 성은 큰 쾌락이자 가장 큰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육체가 항상 신음하는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성은 몸에 즐거움을 주는 음식과 같지 않으며, 혼(soul)에도 즐거움을 줍니다.
인간의 육체와 혼은 성을 갈망하며 다른 이들과 연합되길 갈망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배고프게 만들어 이 큰 즐거움에 있어 만족이란 있을 수 없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산 위에 둔 그분의 메시지인 수사,수녀들은 끊임없이 배고파하는 인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
배고픔은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만족할때 이기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허기를 채우고자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는 가장 배고픈 원수는 마귀입니다. 우리는 마귀를 대적할 수 있으며, 우리 혼과 몸의 영원한 만족이 되시는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라면 우리는 다시는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귀 기울여 봅시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5)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51)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요한복음 7:37, 38)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7)
기도 생활의 다른 요소는:
B.변화되는 기도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번째 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3:18)
여기서 우리가 기도로 주님의 얼굴을 바라 보는 한, 즉 그분과의 진정한 만남을 갖는 한, 기도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화되게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변화(transforming)로 묘사되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요?
기도는 단순한 영적 연습이 아니라, 영적인 일(spiritual work)이며 행동입니다.
위로부터 임하는 신성한 에너지를 내게로 끌어들이는 것이 기도인데, 이 신성한 에너지가 내 안에 부어지고 내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어떤 구체적인 현상 없이 조용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의 인간적인 에너지로는 실패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이 신성한 에너지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나의 본성은 기도를 싫어합니다. 숨겨진 타락의 결과물인 나의 연약한 의지는 나를 자꾸만 편히 쉬는 쪽으로 끌어당기고, 몸이 불편하다거나 기도하기 힘들 것 같다는 거짓되고 속이는 핑계를 찾지만, 이 땅의 목적들을 섬기는 육체적인 활동들이 있을때는 연약해 보이는 이런 의지는 즉시 능동적이고 활기를 띄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성한 에너지는 나를 위로 끌어올립니다; 나의 산만한 마음을 바로 잡아주고, 죽은 마음을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그리고 나를 다른 사람,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변화되는 기도는 또한 시간을 거룩하게 만들어 세월을 아끼게 해줍니다. 이것은 원수의 은밀한 손으로부터 그 날을 보호합니다.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시키며 메뚜기 떼가 먹은 햇수대로 갚아주는 기도입니다(요엘 2:25). 따라서 나의 날들은 더 이상 황폐하지 않습니다; 나의 시간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통제 바깥에서 낭비되지 않습니다; 나의 발은 더 이상 묶여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의 삶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이 아닙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립보서 1:11)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골로새서 1:10)
그러므로, 기도는 묶인 것을 자유케 하고 풀어줍니다; 기도는 주님을 내 삶의 유일한 주인으로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막혀 있던 백성들을 바라보며 옛 선지자가 던진 탄식이 아니었던가요! 그는 울며 외쳤습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이사야 26:13)
이 뿐만 아니라, 기도의 완전한 범위와 기회에 우리를 내어 준다면, 다시 말해 매일의 기도 시간에 영적으로 깨어서 우리 자신을 온전히 쏟아 부어 우리 내면의 깊은 곳을 하나님의 임재 앞에 드러낸다면, 기도의 역사는 우리 내면의 깊은 곳으로 확장되어 마음과 양심을 정결하게 합니다.
이것은 다음의 이유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마음이 정결하게 될 때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 안으로 들어가는데, 이것은 마치 마음의 눈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실수나 악한 사람의 계획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큰 도움의 자원이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16:8)
한편 양심의 정화는 혼을 영적으로 매우 민감하게 만들어, 인간의 동기를 올바르게 하고 굽은 길로 다니지 않게 해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겉과 속이 동일한 사람이 됩니다. 이 놀라운 순결은 그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끌어 당깁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팔복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태복음 5:8)
또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신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브리서 9:14)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도가 비록 개인 차원의 영적인 삶과 관련된 것이긴 하지만, 변화되는 기도는 개인과 관련된 것들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자 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그는 섬김으로든, 중보기도로든, 혹은 자신을 희생하는 일로든, 주께 드려지는 희생제물과 향기로운 제물로 하나님 나라의 일들에 자신을 내어 드리게 됩니다 –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로마서 8:36)
2.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요?
기도는 자신에 관해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에 관해 계속해서 발견해 가는 학교입니다.
기도는, 그것이 기쁨과 찬미의 시간이든 혹은 고통이 몰아쳐서 그분 앞에서 나의 불평을 쏟아 붓는 시간이든, 때와 상황을 막론하고 내가 예배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주님을 계속 나에게 계시해 줍니다.
기도는 나의 상태나 내가 처한 상황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며 비록 나의 날들이 무겁거나, 따분하거나, 단조롭다 하더라도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드리는 예전적인 사역(liturgical ministry)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꾸준한 기도를 올려드린다면, 그와 같은 기도를 통해 주님은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기도는 참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신성한 위임이지만, 이 위임은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 그분에 대한 나의 갈망,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에는 기도를 통한 그분과의 교제가 반드시 있어야한다는 깨달음에 달려있습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인격과 그분의 성품, 그분의 방식에 대한 성경의 말씀을 이해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며, 그분과의 진정한 동역 아래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을 자격이 주어집니다. 시편기자가 말한것 처럼, 이것만이 인간 존재에 만족을 가져다 주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가져다 줍니다: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11)
그 예로서, 예배자가 기도생활에 관심을 기울이고 기도생활을 세워나갈 때, 주님을 아는 지식에 관해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 특징과 특성들을 하이라이트 해보자 합니다. 하지만 지금 말씀 드리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첫째로 말씀 드리고 싶은 특징은:
1) 여호와는 선하시고 친구가 되신다
주님은 사람과 친구 관계를 가지기 원하십니다:
창조 초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구처럼 아담과 대화하면서 그에게 모든 피조물을 보여주시고, 심지어 그것들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19, 20).
우리는 또한 주께서 에덴 동산에서 거니셨다는 말씀을 읽습니다(창세기3:8).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담을 위해 특별한 동산을 만드시고 계속해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원어에 따르면, 우리는 창세기의 첫 3장을 통해 그 동산이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상호 교제가 있는 영구한 처소였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잠언은 이 관계를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잠언 8: 31하) 라고 기록하며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또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전에 주께서 아브라함을 방문하셨을 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창세기 18:17, 18)
이런 관계는 얼마나 감미로운가요! 이런 교제로 인해 창세기 18:23-33에 기록된 것처럼 소돔과 고모라의 문제에 관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설득해 보고자 하는 용기를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특징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 사이의 모든 관계에서 계속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신비한 교제를 누렸는데 우리는 이런 신비한 교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얼굴에 새겨지고 그의 얼굴이 빛날 때까지 40일 동안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했으며 또 다른 40일을 위해 하나님께로 나갔습니다.(출애굽기 34:29).
다윗은 자신의 시편에서 쉬지 않고 여호와를 찬양하면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시편 34:8)
예레미야 역시 주님을 만난 자신의 경험에 관해 우리에게 이런 말을 전합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예레미야 애가 3:24, 25)
이 분이 바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친구가 되십니다!
2) 여호와 나의 하나님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님을 ‘여호와 나의 하나님’ 이라고 부르기를 즐겼습니다. 성경에서 이 표현은 반복해서 나옵니다.
- 모세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출애굽기 15:2)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신명기 4:5).
- 여호수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여호수아 14:8)
- 솔로몬 (그는 아버지 다윗에게서 배웠습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열왕기상 3:7)
- 시편에서 다윗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시편 13:3)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시편 40:5)
- 이사야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이사야 49:4)
- 예레미야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예레미야 31:18하)
어째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여호와’ 혹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을까요?
그 이유는 각 사람이 아주 특별하면서도 매우 개별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다루심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마치 자신만을 위해 계신 것 같고, 자기 주변에 어느 누구도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매우 개인적고 뚜렷한 관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특히 중요합니다. 이 관계는 사랑과 돌보심과 같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속성과는 다른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특정한 다루심을 반영하고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것은 주님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 사람만의 독특한 문제들이나 영역 가운데 그 사람의 중심부를 만지는 다루심입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특별한 개인적인 다루심은 그 사람의 인생 여정에서 특별한 이정표가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의 기억 속에 남게 되며 결코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런 이정표가 없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창조된 목적과 자신의 삶에 주어진 개인적인 부르심의 계획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3. 주님, 구주, 그리고 그분의 구원의 신비
지금까지 우리가 언급한 것들은 구약의 하나님의 사람들의 경험이었습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 구세주의 나타나심을 위한 준비였는데, 그분의 소원은 더이상 사람을 외부에서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거하시면서 그의 존재 전체를 채우고 그를 당신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가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고 그가 가는 곳마다, 또는 하는 말마다 긍정적인 영향력을 일으키게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사명과 메세지를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구별되게 하고 목적과 의미와 만족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이사야 12:2)
이 구원은 ‘큰 구원’ (히브리서 2:3)이라고 묘사되었는데, 아주 위대한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구원은 풍성한 신비와 다양한 은혜로 구성된 수많은 우물들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이 메마르고 단조로와 지지 않도록 이 우물들로부터 지속적으로 공급받도록 우리는 부름받았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이사야 12:3)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새로운 방식으로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주시며 우리 삶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신성한 능력의 원천이신데 이 능력은 육적인 것이 아닙니다. ; 그분은 우리가 의지할 수 있고, 그분을 기다리는 자들을 실망시키거나 수치를 당하게 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시편 기자가 찬송하며 이렇게 말한 주님이십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편 18:1, 2)
4. 놀랍고 경이로우신 주님
성경의 여러 책들에서 어떻게 그분을 놀라우신 주님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 그분의 이름은 놀랍(wonderful)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Wonderful)라, 모사(Counselor)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 그분의 계획이 경이롭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marvelous) 바로다’ (시편 118:23)
- 그분의 증거들이 놀랍습니다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wondeful)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시편 119:129)
- 그분이 하시는 일이 경이(marvelous)롭습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편 139:14하)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시편 31:21)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요한계시록 15:3)
- 그분의 방식이 경이롭고 놀랍습니다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이사야 28:29)
- 그분의 행하심이 놀랍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을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 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다니엘 4:2, 3)
마지막으로 :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놀라우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하)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일들을 선포하고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시편기자한 다음에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시편 7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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