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영적인 삶의 세가지 주요 기초들에 대해 나누고 있습니다. 주요한 세가지 기초들은; 대가를 지불하는 것, 마음의 방향과 나뉘지 않은 마음을 가지는 것, 하나님과 내 자신 그리고 원수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에 대한 나의 관점이 올바를때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하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또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 그리고 다양한 채널을 통해 지속적으로 채우시는 성령의 충만에 대해서도 나눴습니다.
오늘은 내 자신에 대한 올바른 시각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내 자신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지기 위해서는 나의 필요뿐만 아니라 나의 자원들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나의 특권과 나의 책임도 보아야 합니다. 책임은 나의 잠재력과 재능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자신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지위한 4가지 주요 포인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필요들
- 가능하게 하는 자원들
- 특권들
- 책임들 (내 재능들과 잠재력을 사용)
이 네가지 주요 포인트에 대해 올바른 이해와 시각을 가지는 만큼,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성취 할 수있는 온전하고 성숙한 성품을 가지게 될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걷고 살아가는 사람이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는 자주 방해 받고 불완전한 영적생활을 하는 것이며 이런 영적생활은 얼마후 영적인 분투와 갈등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분투함으로 인해 그 사람은 영적인 삶을 그만두거나 걸려 넘어져 후퇴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그 사람의 인격(성품)이 손상되었고 연약해져 있어서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발견해서 순종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의 일부를 발견 할 수 있지만 순종에는 실패해서 좌절감을 느낍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신성한 뜻의 어떤 부분도 발견 할 수 없어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몰라 비틀거립니다. 이것은 필요, 자원, 특권 및 책임을 볼 능력이 없는 미성숙하고 손상된 성품의 결과들입니다.
혼(soul) 혹은 성품(인격)이 성숙하면서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게 될 때, 온전한 혼/인격을 가지게 될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2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 신약에서 ‘성화’의 의미 중 하나는 건강하고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거룩(성화)하게 하다” 는 의미는 그 사람을 교정해서 영과 혼과 육을 온전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영은 교정이 필요합니다. 혼은 교정이 필요합니다. 몸은 교정이 필요합니다.
혼은 사람에게 중요한 영역입니다. 혼은 그 사람의 성품의 영역입니다. 혼이 올바르지 않고 온전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성격은 메마르고, 열매가 없으며, 왜곡되고 연약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쉽게 산만해지고 집중할 수 없으며 많은 두려움이 있고 무엇이 옳고 그른 지를 모르는 식으로 그 사람의 삶에서 실제로 나타납니다. 또한 자주 혼란스럽고 당황하며, 어려워하고 좌절감을 느끼고, 어떤 때는 무언가에 열정적이었다가 다른 때는 동일한 것에 대한 열정을 잃는 심한 변동을 겪습니다.
이런 일들은 그 사람의 혼, 혹은 성격에 성화와 교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성령님께서는 이 과정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할 중요한 원리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만을 기다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성화되기를 원하는 만큼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요구되어지는 준비를 한 만큼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요소 사이에는 항상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 우리의 의지와 역할, 그리고 성령의 일하심
그러나 내가 게을러지고 안주하면, 즉 내 의지적 영역의 일을 하지 않으면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기를 원하신다 해도 방해를 받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께 손을 뻗을수록 그분의 신성한 손도 더 나에게로 뻗어 나와 함께 일하시며 나를 인도하십니다. 나는 길을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내 손을 뻗으면, 그분의 신성한 손이 내 위로 뻗어 나를 인도하시고 내가 걸어갈 방향을 지시해 주십니다;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돌라고 하시거나 혹은 잠시 동안 멈추라고 말씀합니다. 이 진리는 이사야서 30:21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마치 누군가가 나를 안내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길입니다; 조심하세요, 잘못 돌았습니다; 당신 앞에 위험이 있습니다. 안전한 길은 저쪽입니다.”
내 혼과 마음의 방들을 여는 만큼 은혜가 쏟아져 내 혼의 방들을 깨끗하게 하고 손상된 영역들을 고쳐주실 것입니다[1]. 창문이 필요하다면 은혜가 창문을 만드실 것입니다. 문이 필요하다면, 은혜가 문을 만들고 빗장을 끼어서 생각들, 죄 또는 악한 영이 계속 들고 나가면서 나를 파괴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문이 없어서 이러한 잘못된 생각이나 죄가 계속 들어오고 나가면, 그 사람은 망가지고 부패하고 파괴되고 부서진 왜곡된 성격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는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다면 사람들이 보는 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내 깊은 곳에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는 무너져 있으면서, 강하고 유쾌한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을 수 있습니다. 속으로는 반대의 감정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누군가에게 친절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 ‘‘어떤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사람들 앞에서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말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혼이 고침받고 성화되면 진실된 사랑이 있는 정직함을 가지게 됩니다. 내가 말하는 진실에는 사랑이 동반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솔직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성격이 왜곡되어 있고 교정되지 않은채 누군가에게 진실을 말하려고 하면 상처를 주는 날카로운 화살처럼 나옵니다. 우리는 거짓되고 부정직해서도 안되지만 날카롭고 해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속으로는 다르게 느끼면서 겉으로 좋게 말한다 해도, 듣는 사람은 실제로 우리의 혼 속에 있는 것을 받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내 혼을 바로 잡아 사랑과 진리를 부어 주실 때, 나는 순결하고 명료하고 투명하며 진실하게 다른 사람들과 대화 할 수 있게 됩니다. 혼은 순수하고 투명해져서 내가 느끼는 것과 반대되는 말은 하지 않게 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할 말이 있다면, 그는 상처를 받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에게 사랑이 섞인 진리를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치유와 깨달음 그리고 편안함이 있습니다.
혼이 고침을 받고 정결해지기 전에, 내가 솔직하고 진실하기를 원할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혼적인 성향과 동기가 섞이게 됩니다. 어떤 다른 경우에는 특별한 상황에서 나의 실제 성격과 어긋나는 행동이나 말을 하므로 마치 이중 성격을 가지고 사는것 같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 전서 5 장 23 절에 기록된 말씀처럼 성령님께서 분투하고 왜곡된 내면의 혼, 혹은 나의 성격 가운데 아직 일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흠 없이 완전하게 지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령님께서 내 혼을 성화시키시도록 내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몸의 성화는 이보다 앞선 단계입니다. 우리는 성인들의 삶에서 그런 예들을 읽습니다. 어떤 분들은 빛을 발할 정도로 성령님께서 그들의 몸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땅 위로 몸이 뜨기도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영 안에서 한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졌습니다; 어떤 분들은 일주일에 한 번만 먹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40 일을 물로만 금식했습니다. 거의 먹지 않고 금식했지만 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병을 정복했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먹을 때는 음식이 때로 위에 부담을 주어 병이 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몸이 아직 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혼 안에서 당신의 일하심을 완성하시면, 몸은 거룩하게 되고 질병조차 몸을 정복 할 수 없게 됩니다[2]. 음식과 수면 같은 자연적인 필요는 더 이상 필요하거나 필수적이 되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특성들에 변하가 옵니다; 병과 부패가 사라집니다. 성 마카리우스(St.Macarius)는 벽에 기대어 하루에 2시간 동안 잠을 잤지만 그에게는 충분한 휴식이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앞서 단계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이해하고 원하는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입니다. 이런 은혜들은 일부의 사람들이나 어떤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끝까지 순종하고 분열없이 그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드리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성령님과 협력하려면 나는 먼저 이해해야 하고 그런 후 순종해야 합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게 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세아 4 : 6 )”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예레미야 3:15)” 이해한 후에 순종은 나의 선택입니다. 나는 순종하기를 원하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수 있습니다; 또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만 순종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해와 순종은 모두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나눈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습니다.
타락한 본성의 부패로 인한 손상된 혼: 내면의 왜곡들이 나타납니다.
혼이 왜곡되어 있으면 나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진 것처럼, 그리고 마치 나의 혼에 문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어떤 죄가 들어 와서 부패시키거나 파괴 할 수 있습니다; 사단으로 부터 어떤 생각이 들어 와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나는 때때로 화를 내거나 부정한 생각을 하며 내 혼을 통제 할 수 없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죄와 마귀에게 “아니야”라고 말 할 수 없고 그들이 나의 내면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마태 복음 12: 43-45에서 예수님은 혼을 집에 비유해서 말씀 하십니다. 귀신이 집에 들어와서 비어있는 것을 보고 다른 악한 귀신들을 데려와서 그 혼의 집에 거주합니다. 그 집(혼)에 성령님이 계시고 꾸며져 있으며 은혜로 채워져 있다면 귀신은 가까이 올 수 없습니다.
각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고 자신의 집에 문들이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을 그들의 집에 문이 없어서 뭐든지 자유롭게 들고 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죄, 악한 생각들, 그리고 사단.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집에 창문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방향성 없이 바람 부는대로 끌려다니는 것을 의미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관계들 가운데 편애가 있습니다. 어느 날은 특정 관점에 대해 열정적이다가 다음 날에는 다른 관점에 열정적입니다. 하루는 특정 그룹의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고 다음 날은 다른 그룹과 연관됩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집 창문들이 열려 있기 때문에 바람이 들어와 그를 특정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에 다른 방향에서 바람이 들어오면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갑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14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온각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에게 닫힌 창문[3]들이 있다면 원수의 바람이 우리 혼의 땅으로 들어와 통과하여 우리를 끌고 다닐 수 없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창문들이 있다면, 어떤 교리에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습니다. 또는 한 친구로 부터 온 생각으로 인해 그 친구 편에 섰다가 다른 친구로 부터 반대의 생각을 듣고는 다른 쪽 친구에게 쏠려서 처음 친구를 적대시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마음은 편애와 파벌주의를 가진 마음으로써, 때로는 어떤 사람들 쪽에 서서 다른 사람들을 거부하고 그 후에는 다른 사람들 편에 서는 것[4]입니다!
이것은 교활한 원수[5]인 사단이 여러 방향에서 부패하고 독이 있는 바람을 창문이 없거나 창문이 열려있는 집에 불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바람을 관계의 영역으로 향하게 해서 어떤 사람들과 한편을 만들고 다른 사람들을 거부하게 하며 그런 후에는 이전에 함께 했던 사람들도 거부하게 합니다. 그들은 바람을 사상의 영역으로 향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아이디어에 열의를 갖고 다른 아이디어는 거부합니다. 영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열정적일 수 있고 매우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그런 후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서 극단적인 태도로 그것들을 바라보고는 외모나 지위와 같은 세상의 문제들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것은 이 사람에게 정해진 방향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악한 것과 귀중한 것을 분별할 수 없으며 중요한 우선 순위도 분별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영적인 문제가 삶의 일부분이 아니라 생명의 최우선인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영혼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시편 23 : 2). 이 사람은 우선 순위를 올바르게 정할 수 없고 모든 일을 동시에 수행 할 수 없음[6]을 모르며 어떤 특정 시간에 해야할 중요한 일이 있고 어떤 일들은 나중에 해야 함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내면의 집에 창문들이 없거나 혹은 그 벽들 중 한 곳이 허물어져 있을 때 혼에 나타나는 타락의 결과입니다. 이로 인해 그 사람은 자신의 성격에 특별한 특징들이 없고 마치 정해진 방향이 없는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 그러므로 종종 사람들과 상황들이 그 사람을 정의합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성격을 특정 방향으로 정의하고 만들게 하는 어떤 상황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런 후에, 그는 그런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바꾸기를 원하고 또 다른 형태와 모양의 성격을 취합니다.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아마도 그가 이 모양에서 저 모양으로 계속 바꾸는 걸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성화시키실 수 있는 유일하신 그분께 나아갈 때, 그분은 우리가 본래 창조된 신성한 모양 또는 형상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우리 각자는 영원한 신성한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 그분만이 왜곡된 내 현재의 이미지를 수정하여 내가 창조된 올바른 본래의 영원한 이미지로 회복시키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혼의 교정과 성화의 의미입니다.
성화는 참으로 필요하며 이런 성화를 보여주는 예와 징후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아버지들의 삶에 나타난 몸의 성화의 예들에 대해서 말했는데, 비슷하게 또한 혼의 성화의 징후들의 예들이 있습니다.
- 성화된 혼은 평강으로 채워지고 갈등이 사라집니다. 이것은 성화의 중요한 사인입니다.
정신이 명확해집니다. 혼동과 혼란, 동시에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모든 일들을 한번에 하고 싶어하는 대신에 빛이 내 생각에 들어와 내 발걸음을 명확하게 하고 우선 순위와 내가 특정한 시간에 집중해야 할 것들을 분별하게 합니다. 언제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게 됩니다. 그 순간에 집중해야 할 것과 나중으로 연기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동시에 너무 많은 것들에 얽혀서 그중 어떤 것도 수행하지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순서로 생각하고 며칠 후에는 내가 생각했던 우선순위의 순서가 바뀔수 있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은 지적[7]능력으로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스케줄을 짠 후에 계속 변경하면서 결국에 가서는 아무 스케줄도 없다고 결론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나는 목표없이 무작위로 움직이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혼을 거룩하게 하시고 교정하실 때, 나는 내 생각에 오는 빛과 내 혼을 압도하는 평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내 마음에 오는 빛은 내 우선 순위를 결정하도록 도움을 줍니다. 이전에는 많은 문제들이 동시에 떠 올랐습니다. 그러나 성화 후에, 나는 그것들을 제쳐 놓고 각 문제의 적절한 시간을 기다리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모든 문제들에는 적절한 시간이 있습니다. 우선 순위를 정하고 난 후에 덜 중요한 것들이 이러한 우선 순위를 침해하고 혼동시키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올바른 시간과 순서에 따라 어떤 일들은 기다려야 합니다. 처음에는 혼동되지 않을 때까지 이러한 우선 순위가 내 안에서 잘 정착되도록 기록 할 수 있습니다.
- 교정되고 성화된 혼의 또 다른 사인은 감정이 깨끗하게 되고 자유롭게 되는것 입니다.
교정과 성화 전에는 인간의 열정에 따라 살면서 사람들에게 끌리거나 반발하게 만드는 감정의 끈적 끈적한 층이 있습니다 ; 따라서 열정들이 그의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열정과 갈라디아서 5:24에서 말하는 정욕/탐심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갈5:23)
열정은 매력과 반발입니다. 감정이 깨끗해지고 성화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삶은 매력과 반발의 결합으로 매우 피곤합니다; 둘 다 그에게서 평화를 빼앗아 갑니다.
혼이 성화되면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이 온전해지고 자유롭게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을 대할 때는 사랑과 위로가 있고, 멀리있는 사람을 대할 때는 평화와 수용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 (롬8:21)”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 뜻은 자유가 완성될 때 영광이 충만하다는 의미입니다. 성령님께서 감정과 혼 안에서 일하시는 이런 종류의 자유를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영광은 묘사할 수 없으며 오직 보여지고 살아지고 맛보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또한 영광의 즐거움[8]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지만 영광으로 가득찬 즐거움도 있습니다.
혼과 감정 안에서의 성령님의 고유하고 진실된 일하심은 매력과 반발, 갈등과 투쟁으로 부터 그 사람을 풀어주는 자유로 이끌어 갑니다.
성화되기 전에는 누군가가 자신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이용한다고 느끼게 되면 쉽게 긴장하고 불편함을 느낍니다. 끌림은 노예가 되게하고 긴장과 반발은 그로 하여금 평화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따라서 그 사람은 인간됨과 인격을 잃어 버린 인형처럼 됩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삶을 갈망한다면, 이런 성화와 교정의 과정이 우리 혼에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삶은 투쟁과 갈등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표면적이 될것이고 연약하며 깨지기 쉬울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인해 고통받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뭘 해야하지 모를 것이고 우리의 삶에서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살 수도 없을 것입니다.
- 성화의 또 다른 사인은 마비됨이 없어지고 기쁨으로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순종에 실패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을 알고 우리의 다른 뺨을 돌려야하는 것 등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명령들은 너무 따르기가 어렵고 매우 앞선 단계의 것들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성령님이 혼을 교정하시고 성화하실 때는 우리에게 그런 능력도 함께 주십니다 ; 우리는 우리의 의지 안에 할 수 있게 하는 특정한 능력을 받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허리에 우리를 강하게 해주는 능력의 허리띄를 둘러주십니다.
우리는 본성상 게으름과 나태함에 기울어지고 자주 끊임없는 피곤감으로 고통받습니다. 이것은 육적인 피곤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육적 피곤은 몇 시간의 잠으로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혼 안의 깊은 내면의 피곤함입니다. 이것은 잠이나 여가를 갖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혼을 그분의 놀라운 방법으로 고치시기 위해 오실 때는 그분은 우리의 허리를 진리로 두르시고 우리의 느슨함과 출렁이는 허리를 강하게 하고 곧게 만드십니다. 우리는 자주 자기 연민과 무관심 사이에서 요동합니다. 이것은 우리 혼의 허리가 느슨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것과 무관심 사이에서 엎치락 뒤치락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교정하실 때는 우리의 허리에 능력의 벨트/거들[9]을 둘러주십니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의 허리가 힘을 얻고 곧아져서 앞뒤로 구부러지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상처를 주는 말을 하고 내 혼이 자기연민으로 기우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 나는 허리에 띠를 두르고 그 상황을 뒤로 하면서 상처를 입지 않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에게는 신성한 목적이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큰 영광을 주셨기 때문에 말로 인해 내 존엄성에 상처가 생길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게을러 질 때, 내 허리의 띠가 내가 일어나 역할을 수행하도록 힘을 줍니다 ; 내가 한 발짝을 뗄 때, 그분이 열발짝을 가게 하시고, 내가 작은 것을 할때 그분이 그것을 배로 늘려주십니다.
우리를 깊이 변화시키시고 외부 환경을 변화시키는 신성한 선물로 오는 하나님의 축복들에는 커다란 달콤함이 있습니다. 이 축복들은 사람을 인형이 아닌 진정한 인간으로 회복시킵니다.
이제 나의 필요들, 가능하게 하는 자원들, 특권들과 책임들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1.필요들
혼은 자유와 치유가 필요하고 성화되어야 합니다.
성화가 능동적 과정이라면 자유와 치유는 수동적인 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혹은 최근에 혼에 상처를 경험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아픔들은 어떤 사람들이 던진 말들이나 특정한 상황들 그리고 내가 지나온 어떤 고통들일 수 있습니다.
한 동안 지속된 반복적인 죄도 마귀에게 내 혼의 특정한 영역을 지배하도록 기회를 내어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영역들이 마비될 수 있습니다. 이것는 혼에 특별한 영향을 미치므로 성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어린 시절과 성장하면서 충족되어야 할 필요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필요들이 충족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는 안전감을 느끼고, 사랑받고 있으며 환영받고 수용되고 있음을 느껴야 합니다. 만약 부모가 실제로 이런 필요들을 채워주지 못하면 그 아이는 궁핍하고 불만족스러운 혼을 지닌 채 성장합니다. 따라서 이 혼은 치유, 자유 그리고 채워짐이 필요합니다.
이것들은 혼의 필요와 관련된 수동적인 영역입니다. 하지만 또다른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혼은 그 상처들로 부터 치유, 묶임들로 부터의 자유와 필요의 충족과 만족들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습관들과 특성들을 가진 인간의 본성은 성경적 그림에 따라 변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잠자거나 먹는 습관, 또는 익숙해져 우리의 생활의 습관이된 부적절한 것들은 올바른 하나님 나라의 습관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요약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의 표준에 따라 자신의 삶을 측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특정한 습관에 따라 우리를 키운 이 땅의 가족에게 속해 있지 않고 어떤 특정한 습관으로 빠지도록 격려한 친구들에게 속해 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형상을 따르는 새로운 습관과 태도에 적응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형상으로 우리의 육신을 취하셔서 이 땅에서 특별한 태도로 사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기준에 따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에 대한 예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10]하셨습니다. 따라서 누군가 나를 화나게 하면 나도 화가 난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만약 이것이 나의 경우라면, 나는 기도로, 회개로 그리고 성령님께서 내 가족으로 부터 친구로 부터 환경으로 부터 받은 이런 습관들을 바꾸셔서 내 혼을 성화하시고 새로운 습관과 새로운 본성을 불어넣어 주실때까지 한걸음 걸음 움직여야 합니다.
나는 내 자신을 들여다보고 나를 방해하는 습관들을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후 변화될 필요가 있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관습들을 배워야합니다. 이 땅에서 사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내 앞에 두어야 합니다. 또한 나는 그리스도의 발자국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모범을 자신들의 삶에 적용한 하나님의 사람들, 성인들의 본을 보아야 합니다. 이런 예들을 내 앞에 두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들을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히12:1)’ 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이 구름을 다양한 모범으로 관찰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서 이 필요한 변화를 위해 일하고 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가 변화되어야 할 올바른 형상을 우리의 생각 가운데 그려주실 것입니다.
성령님께 더 반응하고 귀 기울이는 만큼 그분은 나의 마음을 자극하셔서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했던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다르게 행동했어야 했는지 주의를 기울이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내가 어떻게 행동했고 어떻게 행동했어야 했는지 보여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나는 주님 앞에 서서 자신을 조용히 하고 나의 행동을 수정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러한 성찰과 수정의 시간에 성령님께서는 내 앞에 그림을 보여 주시면서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강조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였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 나라를 반영한 것이었느냐?” 내가 한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하신 다음 성령님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네가 잘못했다거나 나빴다는 포인트에만 머물지 말아라. 왜냐하면 그것은 나에게 영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얻어야 할 하나님 나라의 다른 그림에 초점을 맞추어라.”
그런 후 성령님께서는 특정 상황에서의 올바른 행동을 내 마음과 생각에 묘사하셔서 그것을 알고, 생각나게 하고,기도로 요청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도록 훈련시키십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나는 한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그리고 한 스텝에서 그 다음 스텝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나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4:19에 말씀하신 그리스도가 내 안에 형성될때까지 은혜 위에 은혜[11]를, 힘을 얻고 더 얻을[12] 것입니다.
이것은 혼의 연약한 영역이 강화되어지는 내면의 형성과 변화의 과정입니다; 왜곡된 영역이 수정되고 부패하고 교만한 영역이 겸손해 집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양을 가진 영역이 변화[13]되는 것입니다
혼은 은혜가 부어지는 그릇입니다. 따라서 이 그릇이 온전해지고, 훼손, 제한, 상처,일그러짐이 없을 수록 은혜로 더욱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넓어지고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이해 할 수 있게 됩니다.
나의 혼은 또한 내 자신의 거울입니다. 이 거울의 반이 깨어져있거나 희미하다면 하나님의 뜻의 작은 부분만을 이해하게 됩니다; 내가 볼수 있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것의 반 밖에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나를 위해 준비하셨지만 내 거울의 반이 희미하고 손상되었거나 깨어져 있기 때문에 볼수 없고, 손상되지 않은 반쪽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혼의 성화는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2.가능하게 하는 자원들
나의 필요들을 이해한 후에는 나에게 주어진 자원들을 또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의 혼은 자유와 치유, 충족되고 변화되어야하며 새롭게 빚어져야 함을 이해했습니다.
사실, 네가지 주요한 필요들이 있습니다 :
- 아동기에 충족되지 못한 필요들에 대한 만족
- 사단의 묶임과 지배로부터의 자유
- 사람들이나 상황에서 기인한 상처로부터의 치유
- 습관과 행동을 새롭게 구성
이것들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을까요?
나에게 허락된 가능하게 하는 자원들을 통해서 입니다.
나의 자원들은 성경과 교회입니다.
- 성경
성경을 읽고 그 읽은 말씀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은 기도의 책입니다. 바울의 서신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것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나는 성경을 이해하고 적용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빌립보에 있는 사람들에게 쓴 서신서는 기쁨에 대한 것임을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이 기쁨을 얻기위한 실질적 단계들은 뭘까요? 데살로니까 사람들에게 쓴 서신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것입니다; 그분의 다시오심을 위해 나는 어떻게 올바른 자세로 기다려야 할까요? 또한 믿음, 소망과 사랑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들이 나에게서 나타날 수 있을까요? 에베소서에 있는 사람들에게 쓴 서신서는 교회,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나의 이해는 어떠한가요? 골로새서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나는 진정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보고 있나요? 어떤 복음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또 다른 복음서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사도행전은 교회가 어떻게 능력으로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성경을 읽을 때, 나는 나의 삶을 영적인 성장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올바른 그림, 올바른 개념 및 올바른 단계를 인식하고 이해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 교회
나에게 주어진 다른 자원은 교회이며, 교회는 실제의 적용입니다. 성경이 강의와 같다면, 교회 생활과 예배는 실제 워크샵과 같습니다.
초대교회 아버지들의 글들은 그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했고 실제 삶에서 어떻게 적용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발견되는 실제적인 단계들입니다.
이 두가지를 연결하는 것에 실패한다면 ; 즉 성경말씀과 그 말씀의 적용을 실패한다면 나는 앞으로 전진할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 어떤 부분들은 이해하면서 다른 부분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의 전기를 읽고 감동 받지만 내가 그런 비슷한 모습으로 변화되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잊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성인들의 전기는 그냥 감동받으라고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13장 7절은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을 단지 쳐다 보기만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전진하기 위한 삶의 모범으로 보고 모방하고자 열망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인이나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에 감동을 받고 그 단계에서만 멈추면 안되고 어떻게 하면 그들을 본받을 지를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단계들을 발견하도록 도와줍니다. 이 성인는 이런 성경 구절들을 살았습니다; 이 구절들은 그의 삶의 전기로 쓰여진 단계들 입니다; 그는 이런 성경 구절들을 살은 것입니다; 그(바울)가 이 서신서의 실제적인 적용인 것입니다; 그가 이런 구절들의 실제적인 단계들인 것입니다.
그런 후 나는 이 둘을 연결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대학 과정에서 실습 워크샵이나 실험실에서 실험없이 강의에만 참석하면 많은 주제들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일부 이론적 정보는 이해하지만 그것을 적용하는 데는 실패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과 교회의 삶을 연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이 우리가 따라야 할 원리들과 사인(표지판)들을 보여 준다면 교회는 이러한 원리들에 따라 살면서 그 목표에 도달한 사람들의 실제적인 예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예배적 삶((liturgical life)은 은혜의 통로입니다. 교회의 성례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각 성례는 우리에게 특정한 은혜와 도움을 전달해 줍니다. 교회의 기도, 찬양, 예배, 시편기도, 교회의 모범이 되는 사역자, 교리, 그리고 전수되는(말이 아니라 보여지는) 믿음, 모두가 다양한 은혜의 통로들 입니다.
교회 생활은 변화의 능력을 받도록 돕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진정한 삶을 산 성도들의 예가 있는 곳입니다.
요약하자면, 나에게는 필요들이 있지만 자원들도 있습니다. 나의 필요들은: 치유됨,자유함,채워짐 그리고 새롭게 빚어짐입니다. 나의 자원들은: 성경과 교회의 삶입니다. 원리들과 단계들은 성경에 있습니다. 적용,실제적인 예들 그리고 은혜의 통로들은 교회에 있습니다.
3.특권들
하나님은 그분을 따르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일들과 성화를 위해 깨어있을 것만을 요구하시지 않고 우리에게 위대한 특권들도 부여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것은 가져가셨고 그분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셨을때 그분이 하신 것들은 우리를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그것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분이 육신 가운데 하신 일들이 우리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 하늘들(heavens)에 오르셨다면, 이것은 나 또한 그분 안에서 함께 오른 것입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14]에 앉히시니 (엡2:6) : and raised us up together, and made us sit together in the heavenly places in Christ Jesus (NKJV)” 나의 장소는 이 땅이 아닙니다; 나의 장소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원수는 내 발아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먼저 올바르게 보고 올바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나는 나의 몸을 욕정과 나를 유혹하는 관점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거룩과 성결의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육신을 취하셨을 때, 그분께서 우리의 몸을 성결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함이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올바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고 두려움이나 유혹의 시각으로 육신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육을 취하셔서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의 역사입니다. 그분이 인간의 육을 취하셨을 때 그분은 죄를 모르셨습니다; 그래서 육신이 성화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또 다른 특권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시각을 가져야합니다.
내가 특권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내 삶에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특권들을 보고 이해하고 내 안에서 믿음이 일어나게 된다면 내 삶에서 이러한 특권의 결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하늘의 자리들(the heavenly places)에 앉혀졌음”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고 나의 믿음이 불러일으켜 지면,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원수들은 내 발 아래 있습니다 [15]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세상은 내 아래 있습니다 ; 나는 세상 위에 있으며 세상은 나를 이길 수 없습니다 [16].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나를 사랑하시고 나는 그분의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는 내 안에 계십니다 [17] ; 하늘의 아버지가 아들이신 예수님의 아버지이신것 처럼 그분은 나의 아버지가 되십니다[18].
이런 특권들은 구속의 축복들입니다. 성경은 이 축복들을 이렇게 부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엡1:3)
이런 다양한 축복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그분의 성육신(그분의 나심, 요단강에서의 세례, 광야에서의 유혹을 포함), 그분의 십자가, 그분의 부활, 그분의 승천 그리고 성령님의 강림입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 계획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들이 있습니다. 성육신으로 이러한 축복들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십자가는 죄와 죽음과 마귀를 정복했습니다. 부활은 우리를 일으켰습니다.
묘사하자면: 만약 뱀이 있는데 내가 그것을 무서워합니다. 나의 형이 그 뱀을 죽이고서 나에게 뱀이 죽었다고 말해줍니다. 하지만 죽어 있는데도 나는 여전히 무서워하면서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내 형이 내 손을 잡은 채 뱀을 밟아보라고 말합니다. 비슷하게,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죄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죽음을 밟으신 것입니다. 그런 후 부활하셔서, 나에게 모든 것을 죽인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나를 그들 위로 들어올리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골로새서 3:1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3:1)
승천은 안식입니다. 그분이 승천하셨고 그분과 함께 나를 앉히셨습니다. 부활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나에게 있는 많은 두려움들 대신에 평강으로 채워져 안식해야[19]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두려워합니다(우리의 욕정과 내면의 문제들), 우리의 부모들(어떤 부모들은 자녀를 사랑하고 어떤 부모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친구들(어떤 친구들은 신실하지만 어떤 친구들은 뒤에서 험담합니다), 사단, 미래 그리고 그외 모든 것들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걸어야만하는 대로 걸을 수 없기 때문에 심지어 영적인 삶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좌절하고 때로는 절망합니다.
승천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자리들(heavenly places)에 앉으셨고 우리를 그분과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문제들 중 하나가 끊임없이 우리를 쫓고 둘러싸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를 이 두려움에 남겨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앉혀 지지 않으면 그분의 완전한 구속의 역사를 즐길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를 감싸고 수용하시는 부드러운 아버지 안에서, 우리를 강권하시는 신성한 사랑 (고후 5:14) 안에서, 우리를 뒤따르는 풍성한 은혜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은혜가 족하기에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그분의 능력이 온전 (고린도후서 12 : 9) 해지는 그분의 능력 안에서 평강과 안식 그리고 신뢰로 채워지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를 섬기라고 보내신 하늘의 천사들의 도움으로 우리를 둘러싸십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히브리서 1:14)”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성인들도 있는데 그들은 우리를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입니다(히 12:1). 또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에게는 교회, 성례 및 다른 은혜의 통로들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귀기울이고, 이해하고 받아야 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들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요약하면,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구속의 축복들이 우리의 특권들입니다. 그분은 성육신하셨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며,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하늘의 자리들에 앉으셨고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4.책임들 (나의 잠재력과 재능을 실행하는 것)
우리가 자유케 되고 그분 안에서 들어 올려지는 위대한 특권들을 받았다면, 우리에게는 책임들도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교회를 향한 책임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향한 책임이 있습니다.
나는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재능들을 충실히 사용하는 활동적인 회원이어야 합니다. 나는 나의 재능들을 나의 영적인 성장과 나의 형제 자매들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의 메세지를 온전하게 전달하도록 나의 재능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각 사람에게는 특정한 재능들과 은사들[20]이 주어졌습니다. 그것들을 더 인식하고 사용할 수록 더 많은 영적 에너지가 교회에 더해질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는 다양한 영적 은사들과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에너지로 충만하게 될것입니다.
교회에서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나의 재능들과 은사들이 있지만 또한 세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다른 재능들과 은사들도 있습니다. 세상의 서클은 동료들 또는 이웃들 또는 내가 세상에서 만나는 다른 서클들 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내가 하는 것은 교회에서 하는 것과 다릅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를 사랑하고 경배하며 그분을 섬깁니다. 우리는 비슷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비슷하지만 똑같은 재능들이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내 형제가 낙담하면 나는 그를 격려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날에는, 내가 낙담하거나 어떤 연약함으로 고통을 겪을 수 있고 나의 형제는 나를 격려해 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제 삼의 형제가 나와 내 형제가 어찌할 수 없는 어떤 다른 문제에 대해 나와 내 형제를 도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전서 5:11에서 말씀하시는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렇게해야(히브리서 10:24-25) 합니다. 우리는 깨어있을 수 있도록 그분의 재림이 가까왔음을 서로에게 상기시켜야 합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메세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으신 분에 대해서 말합니다. 탕자처럼 영적으로 잃어 버렸지만 찾은바 됨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발걸음을 밝혀주어 길을 찾게 하는 빛, 그리고 삶의 부패함과 목적 상실을 제거하도록 첨가된 소금입니다. 생명과 목적이 없는 상태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길[21]로 그들도 걸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것들이 나의 책임들입니다.
결론적으로, 내 자신에 대해서 올바른 시각을 갖는다는 것은 나의 필요들, 자원들, 특권들과 책임들을 볼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 아 멘 +
[1] 바울은 내면의 삶인 “건물”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고전3: 9, 10).
[2] 알렉산드리아의 성 마카리우스는 강한 금욕적 삶에도 불구하고 어떤 병도 걸리지 않고 약 100년을 살았습니다.
[3] 창문들은 생각과 감각이다
[4] 갈라디아서1:10
[5] 고후2:11
[6] 전도서 3: 1
[7] 잠언3: 5, 6
[8] 베전1:8b
[9] 에베소서6:14
[10] 마태복음 11:29
[11]요한복음1:16
[12] 시편84:7
[13] 로마서12:2
[14] 원문은 하늘의 자리들(heavenly places)로 복수로 씀. 이것은 천국(삼층천: 3rd heave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 가운데 살면서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불법으로 차지하고 있는 두번째 하늘의 영역(2nd heaven)에 있는 자리들을 의미함
[15] 에베소서 1:20-23
[16] 요한복음 16:33
[17] 요한복음17:21
[18] 요한일서3:1-2
[19] 히브리서4:9-11
[20] 에베소서2:10
[21] 마태복음5: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