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마음(heart)의 상태 이해하기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13:18-23)

동일한 비유를 누가복음 8장15절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눅8:15)

  • 좋은 땅

강조하고 싶은 첫번째 포인트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 땅은 다른 종류의 땅들이 아니라 오직 좋은 땅이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자기가 들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인내의 정도와 말씀을 지키는 정도는 사람들마다 다릅니다. 따라서 그 정도에 따라 열매도 백 배, 육십 배, 혹은 삼십 배가 됩니다.

이제 다른 종류의 땅을 봅시다.

  • 가시떨기 땅

이런 땅은 세상의 즐거움과 재물과 유혹이 들어오도록 기회를 내어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말씀이 막혀버립니다.

그들의 책임은 그들의 나뉘어진 마음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원하지만 동시에 이 세상도 원합니다. 그들 마음의 일부분은 하나님의 일들로 채워져 있고 또 다른 부분은 이 세상을 향한 염려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위해 구별된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구별됨이란 세상의 관심과 부의 속임수에서 자신을 분리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 돌 밭

이것은  마음의 일부가 돌처럼 딱딱해졌음을 보여줍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말씀을 들을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말씀 안에서 기뻐하고 말씀에 대해 열정적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 날에는 까먹어 버립니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하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이것은 말씀이 그들 안에서 깊이 뿌리 내려서 확고해 지게 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나 고난에 직면하게 되면, 자신 안에 확고함이나 깊게 뿌리내려져 세워진 것이 없기 때문에 그 길을 갈수가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또 다른 기회들을 주시지만, 동일한 일들이 반복됩니다.: 처음에는 열정적으로 시작하지만 환난이 닥쳐오면 견딜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요동치는 마음과 견고함(신실함)의 부족으로 그의 마음은 딱딱해져 버립니다.

  • 길 가(wayside)

또 다른 종류의 땅이 있습니다. 이 땅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탄이 말씀을 뺏어갑니다.

누가복음은 이런 종류의 땅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눅8:12)

이 말씀은 길가처럼 세상을 향해서 자신의 마음을 열어놓은 어떤 사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둘러싼 보호벽들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보호(방어)도 하지 않은 채  세상에서 거래하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런 마음은 길처럼 완전히 다 드러내져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사탄은 열린 문을 발견하게 되고 말씀이 뿌려질 때마다 그것을 훔쳐가 버립니다.

따라서 이 모든 종류의 땅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볼때 이것은 그 사람 자신의 책임인 것이 분명합니다.

2.자신의 마음의 상태에 대한 책임 이해하기

마음의 상태에 대한 그 사람의 책임은 이 비유 바로 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서론부에서 더욱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부분을 읽어봅시다:

예수님 사역의 첫 2년 동안은 어떤 패턴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사역 3 년째에는 그분의 접근 방식을 바꾸고 비유를 사용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왜 비유로 말씀하기 시작하는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13:10)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막13:11-13)

그런후,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서의 말씀을 인용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13:13-15)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이 이미 충분하게 들었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여기서 분명합니다.

그들은 듣습니다. 하지만 듣지 않은 척 합니다. 왜냐하면 듣고 싶지 않고 이해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이해한다면, 찔림을 받을 것이고 회개하고 구원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봅니다. 하지만 보지 않은 척합니다.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습니다. 이것은 어떤 장면들이 그들 앞에 있지만 자신들은 보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도 때때로 이런식으로 행동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이 위험은 뭘까요?

한 사람에게 기회가 계속 주어집니다; 하지만, 그 기회들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않으므로 마음은 둔해지고 민감함도 약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래 전에는 영적인 메시지를 들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열렬하게 회개의 눈물로 반응했습니다. 5년 후에는 열렬한 반응은 덜 열렬 해졌습니다. 10년 후, 그 반응은 훨씬 더 줄어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메시지를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래요. 나는 이것을 다 알아요. 그러나 저는 주님께서 도와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뭘 할수 있나요? 나는 노력했어요. 그리고 계속 노력할거예요.”

우리의 마음이 그 민감함을 읽어버렸기 때문에 이런 일이 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6:8)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셨고 그의 미션과 사역이 어떠할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주 첫 부분: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에 주목하고, 그의 사역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사실, 이사야의 미션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미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사6:9-10)

3.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어떻게 다루실까요? 성경적 원리를 이해합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있어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방법 중 하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에 수많은 기회를 주시는데, 그 사람의 마음이 은혜를 멸시하고 에서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상관하지 않는 시점에까지 이르게 된것을 보시면, 분명하고 구체적인 중요한 일을 하시기 시작합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에 일시적인 심판 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가서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더이상 반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심판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결과가 따라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길에서 자기 자신을 끊어내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는 지역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마음을 향해 심판이 선포되면, 그가 살고있는 지역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 결과 그는 점차 자각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사실, 그는 그 시점에 까지도 자신의 상태를 완전히 인식하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그는 하나님의 다루심에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닫혀진 마음도 그에게는 별다른 차이를 만들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주님에게 물었습니다:

“언제까지 이런 상태가 계속되겠습니까?” (사6:11)

다른 말로 하자면, 제가 심판을 선포하면, 그 심판이 얼마나 오래 지속됩니까?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사6:11-12)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던 사람이 이런 일들이 일어난 후에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까요? 혹은 깨닫기 시작할까요?

그의 주변에 모든 것들이 파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생각할 것입니다. 감지하고 인식하고 긍금해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이전에 일어난 심판의 일들에 대한 수확입니다.

이사야는 주님에게 이런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사6:13)

하나님께서는 만약 그 시점에서 심판을 거두면 그들의 마음은 너무나 딱딱해져 있으므로 다시 똑같은 상태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심판의 상태가 지속되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랜 시간동안 그들은 인내하셨고 그들은 주어진 모든 기회를 다 허비했습니다.

이사야는 충격을 받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스라엘이 끝났다는 의미인지를 주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 “아니다. 이스라엘은 끝이 아니다. 그루터기가 남아 있을 것이다. 모든 상황이 정결하게 되면 내가 이 그루터기가 성장해서 새로운 나무가 되게 할 것이다.”

이것이 실제적인 성경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가 역사 가운데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설명하기 전에, ‘굳은 마음’에 대해 말하는 다른 성경 구절을 보겠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이집트에 재앙이 시작되었을때 이것은 바로가 그 재앙들에 반응하게 만들고자 한 것이였습니다.  출애굽기 7장~11장은 이 재앙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장들을 읽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서 가져올 재앙에 대해서 바로에게 말한 후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Pharaoh hardened his heart :  바로가 그의 마음을 딱딱하게 했다)

그런 후, 또 다른 재앙이 오면 바로는 마음을 바꿧다고 말하면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재앙을 거두시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재앙이 거두어 졌지만, 성경은 바로가 다시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재앙이 마지막을 향해 가면서 우리는 주님이 바로의 마음을 굳게하셨다(출9:12) 라고 말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다른 상황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계속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바로가 계속해서 자신의 마음을 완왁하게 했을때, 하나님은 그에게 굳어진 마음, 즉 반응하진 않는 마음을 주어 그를 심판하셨습니다.


비슷하게 누가복음 13장에서는 같은 포인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눅13:6-9)

삼년은 그 사람에게 충분하고 완전한 기회게 주어졌음을 보여줍니다.(성경에서 3의 숫자는 완전을 의미합니다)

충분한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는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땅을 사용하는데 방해가 되고 지체가 되니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이것을 모세오경, 선지서 그리고 로마서에 나오는 다른 구절들과 연결시키면, 땅이 주님 앞에서 자신의 짐의 무게를 거둬 달라고 신음하고 울부짖고 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바울은 땅과 피조물[1]이 탄식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땅과 온 피조물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을 제외하고 모든 창조물이 자신의 역할을 알고 있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땅은 자신의 역할이 인류에게 열매를 가져다 주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종류의 씨앗이 땅에 심어지면 땅이 그 씨앗이 자라게 하기 위해 하는 역할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에 비료를 주는 것입니다. 태양도 역할이 있고 물도 역할이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땅은 주님께 자신은 열매를 내고 싶지만 나무가 반응을 하지 않아서 늦어지고 있다고 신음하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무를 뽑고 다른 나무를 심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이 나무에게 한번의 기회가 더 주어지게하는 신성한 중보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성경적 원리는 성경의 여러 책에서 언급되어 있으며 적용되고 있습니다.

  • 성경의 예를 통해서 이 성경적 원리의 적용 이해하기

이 원리의 적용을 봅시다.

이스라엘 자손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하신 많은 기적을 통해서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맺은 언약의 부분으로서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 주변국에 선포해야 했습니다(출애굽기 19장).

하지만, 그들은 반대로 행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말도 듣지 않았고 그들을 돌로 치고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선지자에서 다른 선지자를 계속 보내셨고 그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들을 다 써버릴때 까지 그들에게 계속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의 기회가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 후 땅이 그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실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2].

심판이 선포되면, 심판이 완전히 성취될 때까지 지속됩니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70년[3] 이였습니다. 레위기,예레미야 그리고 다니엘서는 하나님의 계산에 따라서 왜 포로 기간이 70년이였는지 알려줍니다[4].

심판의 헷수가 무작위로 선택된 것이 아니였습니다.

레위기 26장에서 읽는 것처럼 땅은 지켜지지 않은 안식년을 누려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안식일은 지키라는 명령을 어겼는데 땅은 안실일과7년째의 안식년, 50년째의 희년에 쉬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땅을 마치 울부짖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땅과 관련된 계명을 어기고, 땅에 안식을 주지 않은 연수가 계산되어 그 기간 동안 회복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작위로 사람을 처벌하지 않으셨으며 의로운 방식으로 계산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한 행위들을 설명하신 후 그분의 의로움으로 땅을 보호하시면 안식하게 하셨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아비(조상)들의 모든 죄악을 마음에서 털어버리기 위해서 이 시간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이 햇수는 그들 자신들을 위한 회복의 시간들이기도 했습니다.

이 포인트는 우리의 회개의 완성에 대한 이해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회개는 어떤 특정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죄는 용서를 받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죄의 결과에서 오는 영향으로 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그 죄의 결과와 영향을 다루기 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죄는 우리의 삶(생명)의 땅에 가시와 엉겅퀴가 생기게 합니다. 이 회복의 시기는 가시와 엉겅퀴에서 땅을 정화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그들이 이 심판의 햇수를 채운 후에 또 다른 기회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은 실제로 일어났는데 하나님께서는 포로의 기간 후에 그들을 그들의 땅으로 다시 데리고 오셨습니다.

이 정결화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땅으로 돌아왔고 죄의 결과와 영향으로 부터 자유케되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구속되었고 그들의 땅 또한 구속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들은 새로운 단계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새로운 단계는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는 단계였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포로상태에서 돌아온 후에도 다른 죄를 저지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우상숭배로 되돌아 가지는 않았습니다. 포로상태에서 돌아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단계였던 것입니다.

역사의 다른 예들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이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수도였음을 알것입니다. 거기에는 많은 위대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와 다루심들이 있었습니다.

역사는 또한 콘트탄티노플이 투르크(Turks)에 의해 함락되어 망하기 전에 사람들의 영적 상태는 최악이였으며 영적 목자들과 지도자들도 애통한 상태였음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어떤 감독(bishop)은 13개나 되는 시계들을 소유했고 금으로 짠 많은 예배 의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매우 세속적인 부유함 가운에 살았고 그들의 영적인 삶은 매우 빈곤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차례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상관하지 않았고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

마침내, 투르크(터키)가 침략해와서 그들을 매우 모욕했습니다. 역사의 이야기들은 투르크(터키)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보여준 야만적인 대우와 박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이야기가 러시아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러시아는 매우 깊은 영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동일한 일이 교회의 리더들 가운데 생기기 시작했고 회중들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성은 세상적인 삶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그들은 또한 유럽의 계몽주의와도 연결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여겨졌던 일부 황제들은 수사들이 필요없다고 말하면서 수도원을 페쇄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교회를 대항하는 심각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것은 심판이였습니다.

이것은 마침내 기도교인들을 매우 가혹한 방식으로 핍박하고 모욕하는 공산주의로 끝났습니다. 공산주의 시대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들을 아마 아실것입니다. 모든 수도원들이 파괴도있고 교회들을 폐쇄되었으며 박물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심판의 시간을 채워야 했기 때문에 수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 다음은 우리의 차례가 될까요? 그렇다면, 언제일까요?

+

[1] 로마서8:22

[2] 앗시리아와 바빌론으로 (열왕기하 17:7-23)

[3] 예레미야 29:10, 다니엘9:2

[4] 레위기26:4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