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오늘은 영적 삶의 기초와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것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왜 이런 기초들을 강조하고 점검하는게 중요할까요?

성경에서는 믿는 자들을 “영적인(신령한) 집(베전2:5)”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3:9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건물이 그런듯 기초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약하고 잘못된 기초 위에 견고한 건물을 지을 수 없습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건물도 견고하고 더 높이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초가 약하면 건물도 부실해서 무너질 수 있으며 위로 높이 세울 수도 없습니다.

영적인 삶도 동일합니다. 기초가 올바르고 견고해야지만 우리의 내적인 영적 건물도 계속 성장하고 높은 단계로 나아갈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영적 삶이 좋고 튼튼한 기초들 위에 세워져 있으면 우리는 생명과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고 그들의 영적 길에 이정표와 방향표지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생명을 지닌 자들(bearers of life)”이 될것입니다.

예레미아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너의 이정표를 세우며 너의 푯말을 만들고 큰 길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을 마음에 두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예31:21)”. 

여기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그분의 나라)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 “어째서 길에서 비틀 거리느냐? 길을 찾을 수도 푯말을 볼 수 없느냐?”  

따라서 우리의 영적 삶이 좋고 튼튼한 기초위에 세워진다면 우리 자신들이 우리가 섬기는사람들을 향한 길의 푯말이 됩니다.

우리가 강조하고 싶은 기초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하나님, 우리 자신, 그리고 적 (마귀)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갖는 것을 포함하는 진지한 나눔을 통해 필수적인 영적 기초들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시각에 대해 중점을 두겠습니다.

왜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시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Image)으로 창초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불완전하고 혼란스럽거나 손상된 것이라면 이것은 우리의 영적 성장과 그분의 형상으로의 변화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내 생각에 있는 그분의 이미지가 제한적이라면 이것도 또한 우리의 변화를 제한하게 될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올바르고 부요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변화는 진실되고 풍요로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시각은 참되고 진실된 변화로 이어집니다.

이 올바른 시각의 기초적인 측면들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 성부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님.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시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 할 것입니다. 그런 후에 삼위일체 각각의 인격에 대해 더 자세히 나누고자합니다.

 

삼위일체

인간 존재의 본질적이고 깊은 필요는 오직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발견함으로만 충족되어지고 채워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진리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삼위일체의 각 위격은 인간의 본질적인 필요를 채우시고 만족시키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필요들을 세 가지 주요 필요들 또는 영역들으로 요약 할 수 있습니다.

  • 소속감의 필요
  • 사람들과 자신, 사람과 창조물 사이의 깊은 화평의 필요
  • 삶에서 특정한 역할이나 메시지를 발견하고 이를 수행 할 수 있게 하는 필요

이런 필요의 요소들의 부재는 우리 삶에서 다양한 반영되고 나타납니다.

어떻게 이것이 우리 삶에 반영되는지 나누겠습니다.

화평이 없으면 죄책감을 갖게되고 이것은 열등감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경우, 그 사람은 종종 보상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열등한 자아를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다른 성격을 가장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과 함께있을 때, 그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가 아닌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집에 돌아 왔을 때 그는 그 자신이 아니였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진정한 내면을 다른 이들에게 공개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달리 어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때로는 자기 자신이 심지어 왜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는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오랜 시간 동안의 죄책감을 가진 결과로서 이 죄책감은 특정 영역에서는 열등감을 가지거나 또 다른 영역에서는 우월감을, 또는 자기 거절감을 가지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기 위한 가짜 성격을 형성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죄책감과 깊은 평화의 부족으로 인해 자신의 진정한 성격은 그 사람 안에서 숨겨진 채 신음하고 고통가운데 있는 반면에 말입니다.

진정한 깊은 평화는 한 사람의 양심이 진정한 용서를 경험할 때에만 올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의롭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용서는 인간 안에 존재하는 깊은 필요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올바르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소속감의 부재는 거부당하는 감정을 가지게하고, 원하지도 사랑받지도 않는다는 깊은 느낌을 가지게 합니다.

부모님이나 형제 자매로부터 자신이  받아들여지고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가족에서 성장하면, 그는 소속의 결여감을 가지고 자라게 됩니다.

가족들이 수용과 사랑을 제공하려 할 때조차도, 그것은 때때로 자신의 깊은 필요를 채워주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로 인해 그 사람은 거절감이나 거부감, 또는 사랑받지 못함, 무가치함, 무시당함의 감정때문에 고통받습니다. 이것은 분노, 불안, 스트레스 및 폭력적인 행동과 같은 다양한 행동을 유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옷이나, 가구, 소유물, 또는 말투 및 행동 등을 통해 자신의 외적인 모습으로 부족한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보완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위해 매력적인 옷을 입거나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은 매우 특이한 자동차를 사는 것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심한 말이나 행동으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행동을 통해서 그 사람은 어린 시절에 겪은, 수용받지 못한 것, 관심 받지 못한 아픔에 대해 반응하고 있는 것이고 성장한 후에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건강하지 않은 행동들이며, 그에 따른 결과가 있습니다.

왜 인간 존재에게는 이런 필요들이 있을까요?

이런 인간의 각각의 필요들은 본질적으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에 기초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가족에 속하도록 가족의 일원이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의롭고 거룩하게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 반영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도 의로워야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벧전 1 : 16)”
  •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선포하는 목적을 위해 특정한 미션을 가지고 수행하도록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런 필요들 중 하나라도 빠지면, 그 사람은 길을 잃은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상황을 보완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악순환의 고리에 들어가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워집니다.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궁극적인 해결책은 인간의 모든 본질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는 삼위 일체로 당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

  • 성부 아버지는 소속하고 싶은 사람의 깊은 필요를 채우십니다.
  • 성자 예수님은 화평과 용서에 대한 사람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 성령님은 각자 자신의 삶에 사명과 역할을 계시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이 역할을 단계적으로 수행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실제적인 관점에서 이것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성부 아버지는 소속하고 싶은 사람의 깊은 필요를 채우십니다.

자신의 자녀를 보살피고 자녀의 피난처, 보호자가 되시는 분이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자녀의 연약함을 포용하고 자녀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내면 깊은 곳에서는 이런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이 원합니다.

이러한 욕구가 충족된다면 우리는 수용됨을 느끼고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성부 아버지께서는 이 필요를 채우십니다!

그분의 신성한 팔이 우리를 감싸고 피난처가 되시고 보호하시며 소속된 느낌을 줍니다. 아버지는 우리 안에서 기뻐하십니다. 아버지 안에서 우리는 사랑받고 수용받고 원함받는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따뜻함과 보호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물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버지됨과 어머니됨을 반영하는 진정한 희생과 관용의 아버지됨과와 어머니됨이 있는 가정에서 어떤 사람이 성장하게 되면, 그 사람은 매일 아침마다 깊은 위로를 주는 특별한 따뜻함의 온기를 느끼며 일어납니다. 그는 사랑받고 있고 보호와 돌봄을 받고 있으며 소속되어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아비지됨과 어머니됨:

하나님은 아버지이시자 어미니이십니다. 하나님은 각각의 자녀가 인격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진정한 성품을 반영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가지도록 의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와 어머니로 강조한 두개의 말씀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사63:16)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사66:13)

아이가 성정하면서 영적 통찰력을 가지기 시작할때  자신의 부모는 만족감과 따뜻함, 부드러움과 보호함을 주는 진정한 아버지됨과 어머니됨의 하나님 아버지를 반영하고 보여주는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신성한 손은 매일 아침마다 우리는 필요한 자이며, 받아들여지고, 깊이 사랑받는 삼위일체에 속한 하나님 집의 일원임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로 부터 자신이 사랑받고 필요한 존재이며 가족의 일원이라는 말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이러한 필요는 더 큰 영원한 것을 반영하는 것임을 깨달으면서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 필요는 제한적인 땅의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외적으로는 벗어질 장막인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영원한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우리는 사랑과 다정함을 원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부드러움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생각에 따른 자신의 책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들 밑에서  자랐을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만족되지 못한 필요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필요들이 치유되고 다루어지지 않는 한, 우리가 아무리 그것을 능숙하게 숨기려하거나 극복하려고 해도 우리의 성격, 우리의 관계 및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고 반영되는 우리의 내면의 신음은 계속 될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따르는 충만한 삶을 살기를 원하며 주님의 신성한 뜻에 따라 우리의 온전한 역할과 책임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숨겨진 내면의 필요들이 충족되고 치유 되는 것은 중요합니다.

플라스틱 용기에 찌그러진 부분이 있으면 모양과 크기가 바뀌어 버려서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와 비슷하게 나의 그릇의 크기와 모양이 변형된 상태라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온전한 역할을 나에게 보여주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나의 온전한 역할은 내 그릇의 온전한 크기와 모양을 통해서만 수행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그릇의 일부분이 찌그러져 있거나 망가진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요구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가능성이 풀어지지 않은 채, 잠재력과 가능성의 부분이 눌려져 있기 때문에 나는 고통가운데 있게 됩니다.

이러한 영역과 왜곡이 치유되고 채워질 때, 그 사람은 충만한 평화와 위로를 경험하고, 자신의 역할을 발견해서 수행하게 됩니다.

이 역할은 이 땅의 교향곡과 같습니다.

교향곡 (symphony)이라는 단어의 중요성에 대해서 조금더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찬양곡 또는 교향곡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 장 10 절에서 우리는 다음의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

헬라 원어에서 이것은  “우리는 시 또는 찬송으로 창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이 땅에서 노래 또는 찬송이 되기를 원하신다고 자주 말씀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스바냐 3:19, 20).

모든 노래는 가사와 곡으로 구성되어 있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시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시에 아름다움을 주기 위해 곡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 곡을 작곡할까요?

바로 성령님께서 영원한 곡이 되십니다. 성령님은 모든 시를 위해 특정한 곡을 작곡하십니다. 그분은 우리 각자의 곡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성령님과의 교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분께서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주시고 내 영에 인쇄된 교향곡이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또한 이 교향곡은 가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사와 함께 곡도 있음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이 땅 위에서 나를 노래와 찬송으로 만들 수 있도록 그분께 기회를 드리도록 나에게 부탁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도하실 때,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또한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교향곡이 연주되기 시작합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도 그 교향곡, 영 안에 있는 시의 노래를 듣게 될것입니다. 그것은 지상의 빛이며 우리 각자에게서 빛나는 영원한 위로가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른 교향곡입니다. 이 교향곡들은 끝이 없습니다.

우리의 내면이 회복되고 고쳐지며  깊은 내적 필요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해 치유 받을 때까지, 우리는 불려지지 않는 시로, 연주 되지 않는 교향곡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시가 발견되어지고 곡이 주어지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리고 우리 주변의 세상을 위한, 불려지는 시, 연주되는 진정한 교향곡이 될 것입니다.

  • 성자 예수님은 화평과 용서에 대한 사람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성자 예수님은 당신의 구속을 통해 화평과 용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

법조문으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둘로 자기 안에서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5)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1:20)

십자가 위에서의 성자 예수님의 구속 역사는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며 우리의 죄책감을 씻으시고 나의 숨겨진 죄를 치유하십니다.

이런 숨겨진 죄들은 어느 시점에서는 그냥 죄일 뿐이 였지만 나중에는 죄책감의 구덩이가 됩니다.

이것은 갈등, 열등감, 보상받으려는 시도들 및 다양한 종류의 심리적 어려움과 갈등의 형태로 표현됩니다. 죄책감이 이 모든 갈등의 원인입니다.

우리는 바르게 살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서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실패하고 실수와 죄로 가득차 있음을 느낌니다. 이것은 우리를 좌절시키고 죄책감과 절망의 장막으로 가득 채웁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반영됩니다. 또한 자신이 나쁜 사람이며, 패배자이고, 승리 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기 거부감으로 고통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그분의 사랑, 그리고 그분의 구속은 죄책감을 치유하고 우리의 연약함과 절망을 능력과 소망으로 바꿉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디모데후서 1 : 7)

 

  • 성령님은 앞서 나눈 모든 일들에서 우리를 도와 주시고 가능하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전능하십니다. 성령님은 부드러우십니다. 성령님은 영원한 노래이십니다.

성령님은 정결케 하는 생명수이십니다.

성령님은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거류하는 동안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동반자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원수, 고소자 앞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보혜사 (파라클레토스)”이십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버지됨과 어머니됨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필요들이 치유됩니다. 그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따스함을 우리에게 전달하시고 그분의 따스함으로 우리를 감싸주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신성한 계획, 즉 아버지가 우리 각자에게 주신 역할을 전달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화목의 역할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그것을 알아가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그 역할과 메시지를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나의 역할을 알게 되면 성령님께서는 내가 그 역할을 이행할 수있게 하십니다. 그분은 나의 능력이십니다. 그분은 나와 함께 걸으시고 나를 통해 그 메시지를 성취하십니다. 그분은 나와 매일 동행하십니다.

그분은 내 안에 계시며 나와 함께 걷고, 그분의 달콤하고 위로의 동반자관계를 허락해 주십니다.

그분은 사도행전에서 “dynamos (헬라어로, 힘, 능력의 의미)”라고 표현되신 것과 같이

신성한 에너지이십니다.

내가 식었다고 느낄 때 그리고 좌절감을 느낄 때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십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다고 느낄 때 그분은 사랑의 발전기가 되십니다.

내 안에 깊숙이 있는 죽음이 드러나 나를 위압할 때, 그분은 생명의 발전기가 되십니다.

그분은 내가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 불구가 되었다고 느낄 때, 나의 능력을 넘어서서 감당할 수 없다고 느낄 때, 능력의 발전기가 되십니다.

성령님은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지속적으로 생성해 주십니다. 구속의 우물은 이미 나에게 이런 것들을 주었고, 성령님은 그것들을 내게 전달해주십니다.

우리가 많은 경우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분은 깨어지고 파괴된 인간됨에 대한 최종적인 그리고 깊고 궁극적인 해답이십니다.

인간 영혼의 궁극적인 회복과, 만족 ​​및 교정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삼위 일체를 거부한 세상, 또는 삼위일체로 실족한 세상, 그래서 삼위일체를 잃어버러 무너진 세상을 향해,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선포하고 자랑해야 합니다. 인간이 어디에 있건 무엇을 믿건 간에 그 내면의 깊은 곳은 지속적으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부르고 필요로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1:3 14말씀으로 결론을 맺길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신성한 아이콘(성화)을 보면서,  때로는 성부 아버지를, 때로는 성자 예수님을,  그리고 때로는 성령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기서는 성부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분이 여기서 사랑하시는 자는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도 사랑하시는 자로, 즉 당신의 자녀로 바라보십니다. 내가 이것을 받아들일 때, 이것은 나를 치유하며 내 안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7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는 죄 사함을 주시는 성자 예수님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8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여기서는 내 안에서 일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맛보게 하시는 성령님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 6 절 :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 구절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 12 절 :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이신 예수님을 향한 말씀입니다).
  • 14 절 :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님을 향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삼위일체 대한 계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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