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기도는 크리스천 신앙의 초기로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예배로서 유대인의 예배에서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예배 드렸습니다.  유대인 필로(Philo)와 같은 역사가들에 따르면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제자들과 함께 시편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세 (행3:1)” 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한 10:9 에서는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행10:9)” 라고 쓰여있습니다. 즉 시간에 따라 했던 시편기도가 초대교회에도 계속 이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아버지들은 성경말씀을 매우 가까이 했는데 그들은 성경의 책(예언서, 역사서 등)들에는 각각의 특별한 중점과 목적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시편을 성령님께서 구약과 신약 시대에 걸쳐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신 예배의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시편기도를 통해 예배의 기름 부으심으로 채워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매일 시편으로 기도했으며 시편을 모든 예배 시작의 토대로 믿었고 따라서 시편기도로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초대교회 아버지들 삶에서의 시편

•    시편기도는 영의 양식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마음(heart)으로 예배하려고 노력하지만 많은 경우 영(spirit)이 아닌 생각(mind)으로 기도합니다. 예배할 때 생각이 영과 하나되기 위해서 영은 특별한 음식으로 힘을 얻고 회복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의 책은 영을 위한 음식인 영의 만나입니다.

초대교회 아버지들에 따르면 시편은 새 이스라엘의 만나입니다. 옛 이스라엘을 40년동안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만나는 육을 위한 음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도 지켜주었습니다. 만나를 먹는 동안 이스라엘은 전쟁에 한번도 패하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기를 싫어했던 사람들이 이집트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문제를 일으켰는데 그들은 만나의 신비한 차원을 맛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만나로부터 영양 공급을 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에게 주신 기도 책인 시편을 규칙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시편을 매일 반복하는 것이 지루한 일상으로 느껴지겠지만 초대교회 아버지들은 어떻게 하나님이 광야에서 매일 이스라엘을 만나로 먹이셨는지 강조합니다. 40년동안 하나님은 한번도 바꾸지 않고 똑 같은 음식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는 말들이 기도를 지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이 문제입니다. 시편을 매일 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로 예배하게 되며 이것이 영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아버지들은 시편기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믿었습니다: 시편은 계속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예배하도록 하기 위한 도입부입니다. 혼(soul)을 강건하게 하기 위해 시편 기도를 시작한 후에 계속해서 ‘수건을 벚은 기도’인 자유기도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3:18)”  자유기도의 목적은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되기 위해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영이 강건하여지고 자라지 않고는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    매일의 시편기도는 훈련된 영의 삶을 살도록 도와줍니다. 
시편기도는 자유기도를 위한 영적 준비기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준비를 위해서는 시간과 성실이 필요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진정한 배고픔을 가지고 겸손함으로 계속 영적 훈련의 과정을 받아들이면, 그는 하늘의 보배들을 맡을 자로 신뢰를 받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이 가진 모든 것을 주시기 원합니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눅12:41-44)

•    시편기도는 우리의 영을 씻어줍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상황을 분별하고 성령님으로부터 올바른 방향과 가이드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 전날에 뭍은 먼지들을 털어내지 않고 하루에서 다른 하루로 그냥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생각(mind)과 혼(soul)을 씻어주는 영의 샤워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기도하면 생각과 혼이 씻겨 집니다: 영(spirit)이 새로워 지고 하나님과 대화할 준비가 되며 민감하게 수용할 준비가 됩니다. 

•    시편기도는 깨지기 쉬운 혼(soul)을 강건하게 합니다.
사람의 혼은 타락으로 인해 부서지기 쉬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행복하고 평안 가운데 있었다가도 어떤 부정적인 상황이나 말을 들으면 곧바로 우울해져 버립니다: 격려와 실망감 사이에서 요동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허리를 동이고 젤리처럼 출렁거리는 우리의 혼을 잘 돌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혼의 나약함은 우리의 영(spirit)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정결한 생수의 강에서 끊어진 상태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책임은 강바닥을 파서 정결의 강물이 다시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시편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시편기도를 하면서 엎드려 경배하는 것은 우리 혼의 허리를 동여주며 깨어있게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인간 구성의 모든 요소들, 즉 혼(soul)/생각(mind)/영(spirit)/몸(body)을 사용해야 합니다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    시편기도는 덮인 수건을 찢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변화를 가져옵니다:  매번 그분의 임재를 경험한다면 우리는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3:18)”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안에 들어갈 때마다 변화를 경험합니까? 수건은 벗겨진 후에도 다시 덮일 수 있습니다. 시편기도의 가장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수건을 찢는 것입니다.
 

세기 초 이집트 수도원의 삶과 시편기도 

4세기 초 이집트에는 시편을 기도하는 두 예배 그룹이 있었습니다. 한 그룹은 와디 엘 나트론(Wadi El Natroun)이라는 지역에 있었고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이집트 남부에는 믿음의 초신자들이 예배자들로 모인 “파코미우스 수도 공동체 (Pachomius communal monastic life)”라고 불리는 그룹이 있었습니다. 이 그룹들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시편 기도를 했습니다.
와디 엘 나트론(Wadi El Natroun) 지역의 예배자들은 매일 시편 150편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시편 109:4절의  “나는 기도할 뿐이라 (I am prayer)” 라는 말씀에 따라서 오랜 시간 동안 기도했습니다. 요즘에 우리는 여러 그룹으로 나누어 24시간 깨어 기도하는 기도에 대해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아버지들은 예수님이 누가복음18장 1절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는 말씀에 근거하여 24시간을 한 사람의 책임이라고 믿었는데, 이것이 그들이 잠을 전혀 자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영적으로 앞선 예배자들은 하루에 2 시간 숙면에 익숙했습니다: 오랜 시간의 계속 이어지는 기도로 인해 예배자는 잠 자는 동안에도 시편을 계속 기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렇게 2 시간을 자는 것은 아니었고 영적으로 앞선 예배자들만 그렇게 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4시간을 자고 나머지 시간 동안은 기도와 재정적으로 자신을 지원하기 위한 노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일을 하는 동안에도 하나님을 계속 생각하며 기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일하면서 성경의 특정 구절을 계속 반복하던지 혹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 저를 도와주세요 / 저를 깨끗하게 해주세요 /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라는 말들을 반복했습니다.
다른 그룹인 파코미우스 공동체는 초신자들이였기 때문에 선택된 시편으로 기도했습니다. 선택된 시편들은 ‘아그비아(Agbia)’ 혹은 ‘기도의 시간들(the book of the hours of prayer)’라는 이름으로 엮어졌습니다. 이 책은 전체 시편 의 반과  짧은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아그비아 책 (The book of Agbia) 

아그비아는 일곱 개의 시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는 시편 119:164에 “내가 하루에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에 근거한것입니다. 이 기도의 중심에는 그리스도 구원의 사역이 있습니다. 

•    제 1시 기도는 아침 6시에 하는 기도로 그리스도의 이른 아침 부활과 관련이 있습니다. 
•    제 3시 기도는 아침 9시에 하는 기도로 성령님이 부어지는 중심의 시간이며 성경은 이 시간에 성령이 사도들에 부어졌다고 말합니다. 
•    제6시 기도는 성경에서 예수님이 못박히신 시간이라고 언급된 12시 정오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    제9시 기도는 오후 3시의 기도로 예수님의 마지막 숨을 내쉰 시간입니다 – 이 시간은 특별한 영적 진리와 연결되어 있으며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요19:30)”고 말씀하신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 하는 시편은 예배와 경배(시편95-100)의 노래들입니다. 못 박히신 예수님께 도움을 간청하는 제 6시 기도를 한 후에 예배자들은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는 말씀 때문에 기뻐하는데 이 말씀은 기쁨이 완성되었고 구원은 영원함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    제 11시 기도는 오후 5시에 합니다. 이 시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리어진 시간으로 이사야의 예언처럼 악한 자들과 함께 장사되었어야 할 시간입니다: 하지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이를 바꾸어 예수님을 새 무덤에 장사합니다. 
•    제 12시 기도는 오후 6시에 합니다. 이 시간의 하루의 끝으로 자신의 생명이 언제든지 끝날 수 있음을 상기하는 시간입니다. 초대교회 아버지들은 자신들 삶의 끝을 늘 상기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를 통하여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늘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며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잃어버린 원인입니다! 
•    마지막 기도의 시간은 자정 12시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마태복음 25장에 근거해서 예수님의 재림을 자정의 신랑으로 기대하며 기다렸고 이 시간의 시편 기도는 여기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각 기도의 시간들은 그 시간들과 연관된 구속의 사역이나 사건들이 중심이 된 12개의 시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건과 관련된 인용문들이 항상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은 아니며 때로는 간접적일 때도 있습니다.

시편 후에는 그 시간의 사건과 관련된 복음서가 나옵니다: 이 또한 때로는 직접적이고 때로는 간접적입니다. 예를 들어 제 3시 기도에서 복음서 읽기는 이 시간의 기도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성령의 부으심에 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제 6시 기도의 복음서 읽기는 산상수훈의 설교인데 이는 이 기도 시간의 주제인 십자가와는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면 결코 삶으로 적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서 이후에는 초대교회 글들에서 따온 짧은 기도 문구들이 나옵니다. 초대교회 아버지들은 – 와디 엘 나트론에 살면서 150 시편을 전부 기도했던 – 시편을 한 편에서 다음 편으로 나열하면서 쭉 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몇 편의 시편들로 기도하고서는 때때로 자신들의 기도를 위해 멈추었습니다. 이 기도 문구들은 시편 구절들 사이 사이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그분들이 했던 기도입니다. 이 기도들은 영적으로 매우 성숙하고 앞선 영적 아버지들이 했던 기도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그것을 받아 적거나 때로는 자신들의 기도에 사용하기 위해 기억해 두었던 것입니다. 많은 기도들은 구절들 사이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기 때문에 모든 기도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일부만 기록되었고 반복되었습니다. 초신자들을 위해 아그비아 책이 준비되었을 때 초신자들의 기도를 돕고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영적으로 앞선 아버지들이 기도한 특정한 기도 문구들이 선택되었습니다. 세기가 지나면서 불확실한 문구들이 첨가되기도 했습니다.

이 문구들 후에 초대교회 아버지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분들은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와 같은 구절을 41번에 걸쳐 반복했습니다. 41의 숫자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39번의 채찍질과 가시 면류관 그리고 못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이 자신의 죄 때문이었음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고통과 수난은 힘과 능력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각 시간의 마지막에는 ‘면죄(absolution)’라는 제목으로 결론 혹은 요약문이 나옵니다. 이 단어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8절 후반부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원어에서 “멸한다(destroy)”는 의미는 “소멸되다(dissolve)”의 뜻입니다. ‘면죄(absolution)’라는 단어는 ‘소멸되다’ 혹은 ‘무죄임을 선언하다(absolve)’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구속이 중심이 된 기도를 할 때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죄들이 소멸되고 사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 죄 사함에 대한 감사의 기도로 마무리 하게 됩니다.

초대교회 아버지들은 십자가를 손에 잡고 시편기도를 했습니다. 십자가를 들고 있는 것은 십자가가 그들의 구속과 구원의 근원인 것과 십자가가 빠진 기도는 모두 무의미한 것임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손에 쥔 십자가에 입맞추며 그들의 사랑을 선포했습니다. 
 

엎드려 경배(절하기) 

초대교회 아버지들은 시편 한편을 읽을 때마다 엎드려서 경배했습니다. ‘경배’라는 단어는 히브리 원어에 따르면 이마가 땅에 닿을 때 까지 엎드려 절한다는 의미입니다(계4:8-10 / 계5:14 / 계11:16). 구약에서 ‘예배’라는 단어로 사용된 히브리어의 뜻은 말 그대로 이마가 땅에 닿도록 엎드려 절한다는 의미입니다.
초대교회 아버지들에 따르면 경배는 그 자체가 완전한 예배로서 이를 매우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분들은 하나의 예배로서 몇 마디의 기도와 함께 엎드려 경배를 자주 했으며 경배에 대한 이해를 다음의 성경적 원리에서 얻었습니다.

•    경배는 하늘의 예배입니다: 천사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방법입니다.(계7:11,11:16)

요한계시록에 분명하게 나타나는 바와 같이 하늘의 예배는 주요한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찬양과 엎드려 절하기. 천사들이 주님 앞에 경배할 때는 그들의 이마가 땅에 닿도록 까지 엎드립니다: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계7:11)”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계11:16)”
따라서 초대교회 아버지들은 주님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을 천국에서 계속 행하여지고 있는 예배의 방법으로 믿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의 말씀에 근거해서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천사들의 사역에는 중요한 성경적 신비가 있는데 초대교회 아버지들은 이것을 이해하였으므로 주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예배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천사들은 변하지 않은 반복된 구절들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엎드려 절하며 예배합니다. 히브리 서신서의 저자는 천사들의 사역에 대해 말할 때 이 부분을 명확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liturgia)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diakonia)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히1:14)”   *** ‘Are they not all ministering spirits sent forth to minister for those who will inherit salvation?’ (KJV) ***

이 구절에서 천사들의 사역(ministry)에 두 가지 단어가 쓰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헬라 원어에 따르면 이 두 단어에는 서로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리터지(liturgy)’라는 의미의  ‘리트로지아(liturgia)’ 와 ‘디컨(deacon)’이라는 단어가 파생된 ‘디아코니아(diakonia)’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천사들의 하는 사역에 대해 말할 때는 ‘리트로지아(liturgia)’를 사용하였습니다. 반면에 ‘디아코니아(diakonia)’는 특별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돕거나 하나님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천사들의 사역에 대해 말할 때 사용했습니다. 

‘디아코니아(diakonia)’는 필요에 따라서 사역의 방법들이 바뀔 수 있음을 나타내는 반면에 ‘리트로지아(liturgia)’는 정확히 반대입니다: 변하지 않고 동일한 사역에 항상 똑같이 쓰여지는 말들을 의미합니다. 천사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사역할 때와 사람을 섬길 때의 사역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이나 표현 보다는 마음의 중심과 예배의 교제를 더 기뻐하십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천사들의 사역을 하나님이 바라는 예배방법에 대한 지표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에서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리터지(liturgies)를 항상 예배의 처음에 넣었습니다. 또한 이것이 초대교회 믿는 자들의 모임에서 매주 반복하여 사용했던 기도들과 단어들로 이루어진 초대교회 예배의식을 묘사하기 위해 ‘리터지(liturgy)’라는 단어를 사용한 핵심적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은 언제나 마음(heart)의 상태입니다!

반면에 사람들을 향해 사역할 때는 영감(inspiration)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필요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메세지에 따라서 사역도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디아코니아(diakonia)의 사역으로 사람들을 섬길 필요가 있으며 각각의 특별한 상황에서 성령님께서 무엇을 말하기를 원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일은 디아코니아의 사역을 배우지 않고는 절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디아코니아”의 배움도 “리트로지아”에 근거합니다. 천사들이 사람들을 향해 “디아코니아”의 영감 있는 사역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천사들)이 하나님을 향한 “리트로지아”의 사역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리트로지아”를 통해서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것을 배우며 그분의 마음(heart)과 생각(mind)을 이해하게 됩니다. 따라서 천사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아 전달하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영적 아버지들의 사역은 천사들과 비슷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필요를 가지고 그들에게 나아오면 그들은 영감 있는 방법으로 그들을 섬겼고 충고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배를 위해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가서는 수없이 엎드려 절하면 시편으로 매일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영적 거인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이러한 영적 리듬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표현할 수 없는 예배의 깊이로 들어갈 것입니다. 

•    엎드려 절하는 것은 묶임으로부터, 삶에 숨어있는 주인 된 것들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행위입니다(우리는 우리보다 더 높은 이에게 절하며 권위를 넘겨줍니다). 이를 통해 숨겨진 악의 주권들이 표면으로 드러납니다.

초대교회 아버지들은 제자들에게 몇 마디의 기도를 하는 동안 엎드려 절하도록 충고했는데 특별히 제자들이 그들의 삶 가운데 극복할 수 없는 문제들이나 특별한 죄들을 호소할 때 그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엎드려 절하며 기도한 결과로 제자들은 문제들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얻었음을 간증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엎드려 절하는 것은 사단의 묶임으로 인한 고질적 죄들의 묶임을 깨트리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아버지들은 말 한마디로 묶임을 끊어낼 영적 권위와 능력이 있었음에도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만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했습니다. 그 이유는 말의 권위로 깨어진 사단의 묶임들은 즉각적으로 문제를 다시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더 강한 악의 영들의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묶임을 깨고 다신 공격받지 않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바로 그 사람 자신이 구속된 믿는 자로서 자신의 묶임들을 푸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스스로 놓임 받는 것 (self-deliverance)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묶임을 푸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엎드려 절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사야 26:13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주인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묶는 악한 영들이 있습니다. ‘주인(lord)’이라는 말은 그 앞에 꿇어 엎드려 절하는 신이나 높은 능력자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절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을 향한 유일한 주인이자 주권자는 하나님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다른 주인들이나 주권자들은 떠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엎드려 절하는 것은 이러한 선포를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반복하여 절하므로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반복하여 선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주 되심이 다른 어떤 권위보다도 높기 때문에 다른 주인 된 것들은 떠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악한 영들의 묶임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사막의 영적 아버지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을 때 그분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을 통해 스스로 놓임(self deliverance)을 받도록 가르쳤습니다. 얼마 후에 이런 사람들은 묶임들에서 놓임 받았음을 간증하며 돌아왔습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이 원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    절하는 것은 몸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방법입니다(롬12:1). 이것은 또한 타락으로 인한 인간의 분열된 모습을 회복하고 복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그들의 몸을 예배로 드리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앉은 채로 기도하면서 마음(heart)으로 예배 드렸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마음(heart)과 생각(mind), 몸(boday)이 하나가 되어 함께 예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몸이 예배에 동참하면 몸과 몸의 자연적 본능들도 정화됩니다. 

반복하여 엎드려 절할 때 얻어지는 열매들은 우리의 기대 이상입니다. 타락으로 인해, 사람의 인적 구성요소들은 서로 붕괴되었습니다: 생각(mind), 혼(soul) 과 몸(body) 사이에 분리가 일어났습니다. 한 사람의 삶이 구속되었을 때 나타나는 일 중 하나는 태초의 창조 때처럼 이 모든 구성요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연결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아버지들은 내적인 삶(속사람)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어떤 사람이 통합과 조화로 회복되는 때를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통합은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아버지들은 이런 인간 구성요소들의 통합을 도울 수 있는 많은 것들 중 하나가 몸과 생각과 혼으로 함께 기도하며 예배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몸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두 가지 방법은 엎드려 절하는 것과 금식입니다. 따라서 초대교회 아버지들은 이 둘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    엎드려 절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에 동참하는 신비입니다. (롬6:8) 또한 죄로부터, 정사로부터, 사단과 그의 권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표현(요일3:18)입니다.

절할 때는 땅에 엎드렸다가 다시 일어나는데 이것은 죄인으로서 죽음 가운데 있었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일어나고 부활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절하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간구하고 일으켜 세워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아버지들은 새로운 부활의 능력을 받아들이기 위해 영의 문을 여는 행동으로서 절하는 것을 계속했습니다.

엎드려 절하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표현입니다. 초대교회 아버지들은 그들의 감사를 말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요일3:18)을 좋아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구원에 대해 그분에게 우리의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