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구절들은 현대인의 성경번역입니다]

신명기 29:29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아직 나타내시지 않은 *비밀*도 있지만 이미 계시해 주신 이 율법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영원히 지키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 속한 감추어진 신비들이 있다는 의미인가요? 그게 사실이라면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들은 나타내지 않으시는 걸까요? 그리고 이런 신비들의 유익은 무엇일까요?
* 비밀:헬라어 원어는 mysterion이며 영어로는 mystery 이다. 한국성경에는 비밀로 번역되었으나 신비로 번역하는 것이 더 원어에 가깝다.*

로마서 16:25-26
“하나님은 내가 전하는 기쁜 소식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선포된 말씀으로 여러분을 믿음에 굳게 세우실 수 있습니다. 그 기쁜 소식은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져 있었던 비밀이었습니다만 이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령으로 예언자들의 글을 통해 계시되고 알려져서 모든 민족이 믿고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1:26
“이 말씀은 오랜 세대 동안 숨겨졌던 비밀인데 지금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여기서 비밀(신비)들은 나타나기 전에 큰 유익을 위해서 얼마 동안 감추어져야 함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9-10
“그것은 성경이 ‘아무도 보거나 듣거나 생각조차 못한 것을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해 두셨다.’ 라고 한 말씀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그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모든 것을 살피시므로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알아내십니다.”

고린도전서2:12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선물을 우리가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구절들은 성령님이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 보이시는 분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이것들(비밀들)을 알 때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더 나타나고 따라서 우리는 그분을 마음(heart)과 마음(heart)으로 알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신비’

– 그리스도는 신비입니다 (골로새서2:2, 4:3 & 에베소서3:4)
– 교회는 신비입니다 (에베소서3:3,4,6,9)
– 복음은 신비입니다 (에베소서6:19)
이 모든 것들은 믿음의 기초이며 신비입니다.

– 믿음 또한 신비입니다 (디모데전서3:9)
– 불법도 신비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2:7)
– 하나님의 뜻은 신비입니다 (에베소서1:9) 
– 경건도 신비입니다 (디모데전서 3:16)

모든 것은 믿음이며 신비입니다

종교개혁 이후, 서부 신학은 모든 것이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절반의 진실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의하면 ‘믿음’은 단순히 믿는 것에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세시대의 영적인 암흑기 이후, 신학은 축소 되었고 이성과 생각(mind)으로 이해할 수 있는 논리와 문제들에만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의 약속들을 받아들이며 믿습니다.’ 등의 말로 기도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생각(mind)을 통해서 믿는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영(spirit)을 통해서 받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5절은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 믿음으로 의롭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가지고 삽니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세가지 요소로 창조하셨습니다: 영(spirit), 혼(soul) 그리고 육(body). 영은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는 요소입니다. 하나님은 이성과 사고의 논리(사고와 논리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를 뛰어넘는 영적이며 신학적인 문제들이 있음을 아십니다. 이런 문제들은 오직 우리의 영을 통해서만 깨달아지며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신령한 문제들을 알 수 있으며, 성령님은 우리의 영 안에 거하십니다. 따라서 믿음이 단지 논리, 이성과 생각에만 국한 된다면 우리의 믿음은 매우 제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신학적으로 잘 알려진 표현을 “모든 것은 믿음이며 신비이다” 로 완성할 수 있겠습니다.

신비는 우리의 영으로 신령한 문제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믿게 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혹은 은혜입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의 완성(성화)을 이루게 하며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완성되게 합니다. 

요약하기

모든 것을 생각 안에서 이해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거부하는 계몽주의 (18세기) 운동 이전에는 믿음과 영으로 모든 것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에 교회는 합의했습니다. 이 계몽주의 운동은 그 나름의 접근 방식과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설명한 것처럼 영적인 것들은 생각이라는 작은 상자 안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이 계몽주의로 인한 상실은 너무나 컸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각/사고(mind)라는 위대한 선물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제한이 없는 하나님의 영과 관련된 영적인 것들에 관해서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진리의 일부만을 받을 수 밖에 없음을 인식해야 하고 잘 이해해서 순종해야 합니다.  진리는 믿음과 영의 기도로만 받을 수 있으며 접근할 수 있습니다. 완벽한 때에 성령님은 우리가 이해할 준비가 되고 필요한 때가 되면 우리의 영(spirit) 안에 받은 것을 점차적으로 우리의 생각(mind)에 지속적으로 계시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더 깊이 성장하게 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신비와 신비로운 삶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모든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려 주셨습니다.” (에베소서1:3)
하나님은 진정 모든 영적인 축복으로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하지만, 이 복들은 무엇이며, 어떻게 받을 수 있고, 어디에 저장되는 것일까요? 
사도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자주 “신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의 신비, 교회의 신비, 믿음의 신비, 구원의 신비 등…
몇 가지 예를 보겠습니다.

예수님:
“…그리스도의 비밀(the mystery of Christ)을 말하게 하시기를…” (골 4:3)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엡3:4)

교회:
“…나에게 그분의 신비로운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 (엡3:3)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5:32)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신부와 신랑의 연합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그 뜻의 비밀(the mystery of His will)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엡1:9) 

복 음: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the mystery of the gospel)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엡6:19)

구 원:
“하나님은 내가 전하는 기쁜 소식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선포된 말씀으로 여러분을 믿음에 굳게 세우실 수 있습니다. 그 기쁜 소식은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져 있었던 비밀(신비)이었습니다.” (롬16:25 / 현대인의 성경)

믿 음: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the mystery of the faith)을 가진” (딤전3:9)

불 법:
“불법의 비밀(the mystery of lawlessness)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살후2:7)

위의 모든 말씀들은 크리스천 신앙과 삶의 기초들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신비(비밀)”이라는 말을 모든 단어들에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뜻일까요? 

“신비(mystery: 한국어 성경은 신비를 모두 비밀로 번역함)”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 “미스터리온(mysterion)”의 번역입니다. 헬라어 미스터리온의 뜻은 감추어진 혹은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아니라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비밀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 아버지들은 크리스천 삶을 이런 이해와 차원(dimension)으로 보았습니다. 신비의 측면에 대한 관점은 그들의 영적인 삶과 하나님과의 동행에 있어 매우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적인 삶은 한계가 없는 반면에 인간의 생각(mind)은 매우 제한적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무제한 한 것을 제한적인 것 안에 넣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제한적인 생각으로 무제한의 영적인 삶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완전한 것도 그 한계가 있으나 주의 말씀은 한이 없습니다.” (시편119:96 / 현대인의 성경)

또한, 인간의 사고능력은 여러 다양한 원인들로 인해서 사람들마다 모두 다릅니다.
– 문맹자들이 있는 반면에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 지능이 평균이거나 평균 이하인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매우 높은 지능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 양육 받은 방식은 사고의 형성에 영향을 줍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분석적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논쟁을 좋아하며, 또 다른 사람은 가르침을 잘 받는 식입니다.
– 세대 간의 변화와 격차는 각 세대의 사고 방식에 큰 변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세대에서 교회는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박해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생각과 사고 방식, 그리고 반응의 방식에 어두운 그림자를 가져왔습니다. 또 다른 세대에서는 거룩함과 거룩한 사람들로 인해 교회가 빛 가운데 있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사람들의 생각에 신령한 빛이 비추어졌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제한적이고 많은 변수와 환경에 영향을 받습니다. 따라서 신령한 문제들과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변화와 변수가 많은 생각 아래에 둘 수도 없으며 그렇게 하는 것은 적절하지도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에게 있어 성령님의 말씀을 받아야 하는 영역은 그 사람의 영(spirit)이라는 것입니다. 

실제적 적용을 위해서 ‘성경읽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초대교회 영적 아버지들은 성경을 이해하든지 못하든지 규칙적으로 매일 읽도록 충고했습니다. 만약 읽는 사람이 주석이나 해설책에서 특정 구절에 대한 해설을 찾게 되면,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 구절을 모호한 의미로 이해하게 되고 무한한 것을 유한한 것 안에 집어 넣게 됩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그 구절에 대한 해석을 읽는 데서 멈추면 엄청남 손실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구절에 대한 특정한 뜻을 그의 생각에 이미 넣었기 때문에 그 구절에 담긴 더 크고 깊은 차원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서 주석을 무시하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실 주석은 매우 유용하며 중요한데, 특히 성경 각 책들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알려주며 우리의 이해를 돕습니다. 기독교 초기부터, 위대한 신학자이자 사상가였던 오리겐(Origen), 그리고 4-5세기의 존 크리스소톰 (Saint John Chrysostom)같이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주석 책들(books of interpretation)은19세기나 20세기 까지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초대 사막의 영적 아버지들은 성령님으로부터 이런 특별한 은사를 받은 아버지들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영적 아버지들은 주로 형제들의 질문들에 답변을 주었으며 질문한 형제가 그 답변들을 기록했고 그 기록들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졌습니다.

큰 손실이자 위험은 만약 한 사람이 자신의 생각에 있어 오직 한가지 해석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하게 되면 그 사람은 이 한가지 해석에 정신적, 영적 제약을 받게 되어 더 깊은 말씀의 의미와 계시가 열려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경계가 없기 때문에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간의 이해 안에 제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주석 책에 의지하고 그 수준에서 멈춘다면, 우리의 생각(mind)에만 빛을 가져오고 다른 영역들은 계속 어두움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spirit)은 제한이 없는 열린 공간과 같아서 우리가 기회를 주는 것만큼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열정적이고 신실한 마음(heart)으로 주님께 나올 때 마다, 은혜의 선물들은 그 사람의 영(spirit) 안에 저장됩니다.  생각(mind)은 아주 조금 혹은 많이,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이해하겠지만 은혜의 선물은 이미 영안에 저장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때가 되면 그 사람은 이해하고 깨닫게 되며 다른 사람들도 일깨워주게 됩니다.  

삼위의 한 인격이신 성령님은 한 사람이 그의 구원을 이루어 가도록 쉬지 않고 도우시는 분이며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와 동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안에 저장된 것을 꺼내어 적절한 시간에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의 생각에 완전하게 전달하시는 책임을 다하십니다. 성령님 자신이 생각을 열어서 말씀을 이해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잃어버리거나 도둑맞거나 잊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24:45)

이로 인해 초대교회 아버지들은 그들의 영에 불을 지피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타락 이후 사람의 영은 위축되었습니다. 본래 사람의 영은 매우 탄력이 있고 풍선처럼 늘어납니다. 우리가 불을 지필 때마다 영은 확장되지만 방치할 때마다 빨리 줄어들어버립니다. 매일 같이 영양을 공급한다면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영은 제한이 없기 때문에 계속 확장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비는 사람의 영 안에 먼저 저장되고, 그 이후 때가 되면 한계가 있는 사람의 생각으로 계시되어 이해하게 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신비”라는 단어를 좋아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아버지들 또한 이 단어를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삶은 신비이며 영 안에 저장되어 점차적으로 생각에 계시된다는 것을 강조했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계시는 감정의 영역으로, 느낌의 영역으로 그리고 어려운 경험으로 인해 상처 받은 혼(soul)의 영역으로 까지 확장되어 치유하고 정결하게 하며 빛을 비춥니다. 모든 영적인 선물은 영(spirit)에서 생각(mind)으로, 혹은 영(spirit)에서 혼(soul)으로 이동합니다. 

성경 이외에 구원의 절기들(Seasons of Salvation)이나 성찬과 같은 다른 채널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신비들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 기초적이며 필수적인 영적인 삶에 대한 이해의 결여는 얼마나 큰 손실인지요!  결과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재는 매운 얕으며 표면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에는 규칙들과 원리들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이것을 이해할 때 그는 삶의 여정의 길 가운데서 어떤 방해나 반대, 거치는 것들이 있다 해도 그 길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교회가 이전 세대로부터 지금까지 전달한 깊고 진실된 기초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증인이 없는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신비로운 영적인 삶의 살아있는 모범들을 보기를 열망하는 지금의 세대 속에서 많은 증인들을 열망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이사야43:12)